『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은 소리만 요란하다. 이런저런 회의를 무수히 열고 무슨무슨 대책을 줄기차게 제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속빈 강정이다.』현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다. 장미빛 청사진으로기대만 부풀려 놓고는 애프터서비스가 없기 때문이다. 「빈수레가요란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경제정책이 구호로 끝나서다.◆ 박재윤의 ‘신경제’, 구호정책 시작김영삼 정부는 출범초기 경제정책의 3대원칙을 제시했다. 「자율성·일관성·투명성」이 그것이다.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에 맞게그동안 관주도에서 벗어나 경제활동의 주체인 기업과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정책결정에 있어서도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과정을 모두 공개하여 한번 결정된 정책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것이다. 과거 군사정부와 차별성을 부각시키겠다는 뜻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던 대목이다.그러나 이런 3대원칙이 그동안 제대로 지켜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거의 없다. 현재로선 그런 원칙이 있었는지에 대해서조차 기억이희미할 정도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하는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현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이런 불만은 잦은 개각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경제수석은 4명, 경제부총리는 5명이 임명됐다. 경제수석의 평균재임기간은 11.5개월, 부총리는 9.2개월에 불과하다(11월말 현재)는 얘기다. 모두 1년을 넘지못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시절 부총리 재임기간이 평균 2년5개월이었고 5공화국 7년동안 경제수석이 3명(그것도 김재익 수석의 아웅산묘소폭발사건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친 것과 크게 대조적이다. 「수습」 부총리와 「견습」수석만 양산한 셈이다. 정책일관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장관을 맡을 경우6개월 정도는 업무파악을 한 다음 그뒤에야 소신있는 행정을 펼칠수 있기 때문』(모전직장관)이다.일관성 결여는 자율성과 투명성 확보에도 치명적이다. 현정부 출범이후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규제완화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개혁차원」에서 규제완화를 추진해 왔으나 결과는 낙제점에서 맴돌고있다. 『3년여에 걸친 규제완화가 서류간소화 등 지엽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전경련)는 평가가 그것이다.정책결정의 투명성도 그다지 확보되지 못했다. 토론은 없고 일방적으로 결정하기 일쑤다. 부처간 손발이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것은당연하다. 지난 95년 소고기유통문제로 시발된 한미통상마찰과정에서의 불협화음, 그린벨트완화와 관련된 말바꾸기, 노동법개정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근로자지원대책에 대한 부처갈등 등이 대표적인예다.잦은 개각과 함께 「구호정책」도 정책신뢰성을 잃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신경제(박재윤) 세계화(한이헌)고비용·저능률구조 혁파(나웅배) 경쟁력10%제고(이석채) 등. 사람이 바뀔 때마다 각자의 성격과 「차별화」 전략에 따라 내세우는 구호가 다르다. 자세히 따져보면 그게 그건데도 말이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의「잘살아보세」와 5공화국의 「정의사회구현」, 6공화국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등과 뭔지 모르게 닮은꼴이다.구호정책의 시발은 「신경제」였다. 서울대 교수에서 경제수석으로자리를 옮긴 박재윤 현통상산업부장관이 내세운 문민정부의 경제철학이었다. 경기부양책은 「신경제100일계획」으로, 그때까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신경제 5개년계획」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이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도 「신경제추진회의」로 불리고. 박수석은『김대통령이 신경제 교주고 자신은 전도사』라며 중앙부처 장차관은 물론 고위공무원을 모아놓고 부흥회(연수·교육)까지 가질 정도였다. 신경제는 신성불가침의 바이블이어서 말문이 막히면 「신경제」를 들먹이면 무사통과였다. 그러나 신경제는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미완성품으로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 있다. 전도사는 날개가 꺾여 재무부를 거쳐 통산부에 칩거하고 있는 중이다.박수석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한이헌 수석의 화두는 「세계화」였다. 그는 취임 한달후 김영삼 대통령의 「시드니선언」을 통해세계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정부는 물론 기업과 개인들도 세계화를위해 일로매진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세계화의 첫작품이바로 94년말에 단행된 정부조직개편이다.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목표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한다는게골자였다. 「공룡(재경원)」의 등장으로 정책왜곡이 생겨도 세계화를 위한 학습비용으로 치부됐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내세워최대의 「과소비」로 꼽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위해안달한 것도 이때부터다.◆ ‘부동산실명제’ 홍부총리 깔끔하게 처리「조용하고 합리적인」 구본영 수석은 이렇다할 구호를 내세우지않았다. 『수석이 나서면 일이 꼬인다』는 지론에 따라 내각에서하는 일을 뒷받침하겠다고 스스로의 손과 발을 묶어 버렸다. 이런실무적 처신이 오히려 그의 단명을 가져오는 아이러니가 됐다. 전임수석들이 평균 1년5개월동안 「장수」한 반면 그는 절반에도 못미치는 8개월만에 과기처장관으로 「영전」했다.이석채 수석은 이런 움직임을 재빨리 캐치했다. 취임후 1개월만에「경쟁력 10%제고」라는 구호를 만들어 내는 기민함을 보여줬다.그것도 미진했던지 「경상수지 반으로 축소」라는 화두까지 가세시켰다. 왠지 수치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절대시하던 「3공」으로되돌아간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의식혼란을 초래했다.『시대변화에 맞게 주도권을 시장에 맡겨야 하는데 이수석은 그런마인드가 없다』(재경원 X과장)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민정부초기 내세웠던 거창한 「신」경제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경제수석의 이런 구호정책은 부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경제부처의경제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구호를 내걸든 그렇지 않든결과는 마찬가지다. 발표만 해놓고 시행이 제대로 이뤄지는게 많지않아서다. 자본재 육성대책(95.5.9)이나7·3경제운용방향(96.7.3)이나 골자는 그게 그것이다. 이것 저것잔뜩 차려놓기는 하는데 막상 숟가락을 들면 먹을게 없다는 얘기다.현정부의 최대 치적중의 하나이며 「개혁중의 개혁」으로 이경식부총리 시절 단행된 금융실명제가 대표적인 예다.현재 실명제 시행전과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예금할 때 주민등록증을 꼭 갖고 가야 한다(요즈음은 그것도 잘 지켜지지 않지만)는불편함을 빼고는 말이다. 지하경제가 여전히 융성해 세원확대를 통한 「넓고 얇고 고른」 세금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내년 5월에 금융소득종합과세가 처음으로 시행된다고는 하나 제대로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주식과 채권, 그리고 현금 등 빠져나갈구멍이 워낙 크고 많기 때문이다. 정부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3만1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한사람도 없을것』이라는 비아냥은 이런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실명제나 종합과세가 모두 종이호랑이라는 얘기다. 금융실명제 「시행」이라는데만 초점을 맞추고 구체적인 시행방안은 옹골차게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나웅배 전부총리는 아예 구호를 내세웠다. 한때 유행어가 됐던 「고비용·저능률 구조혁파」가 그것이다. 그는 고비용구조를 없애기위해 무리하게 지준율인하를 통해 은행대출금리와 회사채수익률을끌어내렸다. 지난 4월 회사채유통수익률이 연10.4%(4월26일)까지 떨어져 금리 한자리수시대의 꿈을 설레게 했다.그러나 누르면 터지게 마련이다. 한달도 채 못돼 11%대로 다시 오른뒤 상승세를 지속, 12.65%(12월6일)로 연중 최고치로 뛰어 올랐다. 지난 11월8일 2차 지준율인하가 있었으나 고개를 처들고 저항하는 오름세를 꺾지 못했다. 「경제는 구호로 바뀌지 않는다」는진리가 증명된 셈이다. 이는 운좋게도 「약체」수석을 만나 내각우위 체제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8개월의 단막으로 끝내게 한 요인이되고 말았다.한승수 현부총리는 구호와 실제사이를 줄타기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이수석을 상대로 경제이론(교수출신)과 정치감각(국회의원출신)을 무기로 슬기롭게 요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뚜렷한 색깔과 구호를 내세우지 않고서도 부정적 평가에서 어느정도 떨어져 있다.상대적으로 구호정책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홍재형 전부총리였다.재무부장관시절 「주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묵묵히 업무를수행한 그는 부총리 영전후에도 색깔을 보이지 않고 부동산실명제실시 등 굵직굵직한 과제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신임으로 4·11 총선에 낙점받아 낙선하는 것으로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역풍을 맞았다.아직도 구호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경제는 그럴듯한 구호 한마디로바뀌지 않는 살아있는 유기체인데도 말이다. 사람을 자주 바꾸어서도 안되고 바뀐 사람들이 말로만 하는(Lip Service) 전시행정에 머물러서도 안된다.『구호(Shibboleths)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공동체의식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우리는 구호를 뛰어 넘어야 한다. (금융)정책은 슬로건에 바탕을 두고 시행되기에는 너무도 진지하기 때문이다.』(폴 크루그만·The Economist, 8월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