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 경영 배우자’ 붐

전형적인 샐러리맨 화려한 성공담을 잘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시마' 시리즈의 국내판 표지.지난 4월 1일, 일본 아사히신문 석간 12면 인사 특종 기사에 실린 시마 고사쿠 사장의 프로필이다. 일본 베이비붐 세대(단카이)의 대표 주자인 시마 고사쿠가 업계 1, 2위 전자회사의 합병을 통해 탄생할 하츠시바고요 지주회사의 초대 사장에 취임한다는 내용이었다.이 기사는 다음날 다른 신문들이 일제히 후속 보도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고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됐다. 마이니치 요미우리 니혼게이자이 등 주요 신문이 사장 내정자의 기사를 약력까지 넣어 보도했다.그 후 5월 29일 ‘시마 사장 취임 기념회견’에는 200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신문들은 그 다음날부터 시마 사장 취임을 축하하는 산토리 맥주의 전면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6월 7일자 ‘주간 겐다이’는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냈고 6월 13일자 ‘주간 아사히’는 차기 일본 총리 후보 1순위로 꼽혔던 아소 다로 전 외무장관(현 총리)과 시마의 특별 대담을 커버스토리로 뽑았다. 두 인물이 악수하고 있는 사진을 배경으로 ‘힘내, 일본!’이란 제목이 표지에 내걸렸다.그러나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6월 11일 “일본의 가전기업 하쓰시바전산에서 시마 고사쿠가 승진 과정에서 보여준 여러 모습은 기업 최고경영자(CEO)로서 적절한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칼날을 세웠다. 우선 그는 이혼할 정도로 가정생활을 소홀히 했고 20년 이상 어린 직장 부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는 것. 또 상관인 하츠시바 사장이 인수·합병(M&A) 위협에 시달리는 친구의 기업을 도우려고 시마를 파견하고 회사 자금을 동원해 그 회사 주식을 사 모으는 배임 행위를 한 사실에도 주목했다.‘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샐러리맨’이라는 시마 고사쿠는 사실 실존 인물이 아니다. 만화가 히로카네 겐시가 만들어낸 ‘시마 과장’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총 3000만 부가 팔린 이 시리즈는 1983년 ‘주간 모닝’에서 연재가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시마는 부장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6월부터 ‘사장 시마 고사쿠’라는 제목으로 새 이야기가 나왔다.그렇다면 왜 일본인은 물론 서구인들까지 한낱 만화책 속의 인물인 시마 고사쿠에게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가질까. 삼성경제연구소(SERI)는 시마 고사쿠가 일본 샐러리맨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과서라고 밝혔다. 그는 같은 세대의 일본인처럼 일에 모든 것을 건 기업 전사다. 목적 달성을 위해 계략도 구사하고 여성 관계도 복잡해 도덕적으로 보면 흠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톱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늘 대의(大義)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파벌·상사의 사적 이익과 기업의 공적 이익이 충돌할 때 그는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또 시마는 일본 CEO상(像)을 제시한다. 시마는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지 않는다. 그는 각 부문의 의견을 조율하는 조정형 CEO, 즉 화(和)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일본형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것이다.시마 시리즈엔 시대마다 기업 현장에서 펼쳐지는 화두가 담겨 있다. 그가 과장이던 1980년대는 일본 경제가 버블 호황을 구가하며 해외의 부동산·기업·그림 등을 사들이던 시대였다. 시마 과장은 교묘한 정보전을 펼치며 미국 영화사를 인수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2002년 임원이 된 이후엔 주로 인도과 중국 등의 해외 사업 쪽에서 활약하며 식어버린 성장 에너지를 해외에서 찾는 전략을 주도한다.박찬희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만화는 사회적인 이슈의 핵심을 가장 빠르고 쉽게 전달해 준다”면서 “일반적인 논문이나 서적이라면 빙빙 돌려 어렵게 이야기할 사안도 만화는 ‘에센스’만을 담아 곧바로 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마 시리즈가 20년 넘게 직장인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직장인의 애환과 고민을 가장 적나라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최근 들어 CEO들 사이에서 ‘인문학’ 바람이 거세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인문학의 바닥에 숨어 있는 ‘상상력’을 통해 위기를 넘어서자는 이유 때문이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상상력의 보고로 만화를 꼽는다. 무한한 내용을 그림 몇 컷과 글 몇 줄로 가장 저렴하게 담을 수 있다는 미디어의 특성 때문이다. 앞서 말한 시마 시리즈는 물론 국내에서 직장인의 필독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신의 물방울’이 대표적인 예다.실제로 박 교수는 만화를 강의 자료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충실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면 만화든 교과서든 논문이든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이다.사실 만화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만화 시장의 주요 독자가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다. 이 때문에 소재의 저변도 넓고 취재도 충실하다.예를 들어 일본 만화 ‘감사역 노자키’는 은행의 감사 임원인 주인공을 통해 은행의 지배구조 문제와 더불어 경영권 다툼, 인수·합병, 전산 통합 등 매우 전문적인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흑선’은 미국 기업에 피합병된 일본 자동차 회사 사원을 통해 구조조정과 외자 도입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또 재무성 신임 관료가 주인공인 ‘현재관료계 모후’는 정부 예산을 둘러싼 부처 간 다툼과 정치권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다.또 오사카의 사채 시장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인상적인 ‘오사카 금융도’, 대기업 여비서의 눈을 통해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낸 ‘여비서 리나’ 등도 전문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는 작품이다.박 교수는 “이처럼 많은 정보와 작가적 고민이 담겨 있는 만화들은 오히려 어린 학생들보다는 원숙한 CEO들이 읽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며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CEO라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좋은 만화책을 찾아보라”고 말했다.실제로 만화에서 경영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고 인터뷰를 고백(?)한 CEO들은 꽤 많다. 레인콤의 양덕준 사장, NC소프트의 김택진 사장, 코스맥스의 이경수 사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CEO들이 만화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로 ‘독서의 효율성’을 꼽았다. 박인하 교수는 “짧은 분량에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만화책은 경영자의 효율적인 독서를 위한 최고의 미디어”라고 말했다. 일례로 KTB투자증권의 권성문 회장은 기업계의 만화 마니아로, 해외 출장 때마다 만화 한 질을 여행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간다고 알려져 있다. 고된 출장길에서 골치 아픈 경영 서적보다는 재미있고 간결한 만화책을 읽는 게 훨씬 많이 ‘남기’ 때문이다.박 교수는 ‘장인정신’과 ‘직업정신’을 다룬 만화들에 특히 주목했다. 훌륭한 기업인에게는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이 같은 정신을 표현하는 데는 딱딱한 논문이나 경영 서적보다 만화가 더 좋은 미디어라는 설명이다. 그는 ‘명가의 술’이나 ‘어시장 3대째’를 기업인이 가져야 할 장인정신·직업정신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꼽았다.그는 또 “만화는 조직원들에게 친근하게 경영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강조했다. 최병렬 신세계푸드 사장은 사장에 오른 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모든 사원에게 읽도록 권유하며 장인(匠人) 정신을 주문해 화제가 된 바 있다.시마 고사쿠(島耕作): 1947년 일본 야마구치현 출생. 70년 와세다대 졸업. 하츠시바전기산업 입사. 83년 하츠시바전산 과장. 2002년 하츠시바전산 이사. 2008년 5월 하츠시바고요지주회사 사장 취임.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