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섣달 생인 아버지 청곡(靑谷) 유승헌(劉承憲) 박사를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한결같은 전문인으로서의 자세를 한 치도 흩뜨리지 않고 평생을 살아오신 점이다. 1945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셨으니 무려 63년이나 의료인으로서 당신의 좌우명인 ‘이명아명(爾命我命·환자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란 뜻)’을 실천하시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그리고 깨끗하게 살아오셨다.1982년의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어떤 산모가 갑자기 아기를 낳을 듯한 긴급 사태가 일어났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두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침착히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해 산모와 새로 태어난 아기 모두 무사히 배에서 내릴 수 있도록 했다.1984년 가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인들과 유럽 여행을 가셨을 때 함께 갔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병이 났다고 한다. 이때도 당신의 진단과 갖고 있던 구급약으로 깨끗이 병을 낫게 해 줘 여행 기간 내내 미국인들의 칭찬을 들으셨다고 한다.아버지는 연세를 아주 많이 드실 때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헌을 읽고 관련 학회와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최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셨다. 전문인으로서의 실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삶에 대한 균형 감각도 잊을 수 없다. 우선 시간 배분을 아주 적절히 하셨다. 의사로서 일하는 시간, 자신의 건강과 능력 개발에 투자하는 시간, 가족 또는 친척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 사회 봉사활동이나 사교를 위해 쓰는 시간 등등 어느 부문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또한 어느 한 부문이 다른 부문들을 압도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이러한 방식은 인간관계나 돈을 쓰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가족·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직업상 만나야 하는 환자들, 선후배 의사들, 고교·대학 동문들, 병원의 직원들 등 여러 집단의 사람들 모두에게 가장 적당한 정을 쏟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디 가나 환영 받는 사람이 되셨다. 이 점은 자식들이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다.결코 돈을 낭비하시는 일이 없었지만 써야 할 때는 과감하게 쓰시는 균형 감각을 갖고 계셨다. 그래서 의사로서 당신을 길러준 세브란스의대(현 연세대 의대)에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시고 평생 절약해 모은 돈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만드시기도 했다.이러한 균형 감각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려는 노력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아버지는 모든 정규교육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 받으셨다. 따라서 일본사는 훤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 역사는 잘 모르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는 참으로 열심히 한국사 서적들을 탐독하셨다.영어보다는 일본어에 더 능숙하지만 영어가 더 중요하다고 확신하시고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 그래서 독일의 세계적인 경영학자이자 나의 벗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만나셨을 때도 거리낌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시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즐기기 위해 꾸준히 컴퓨터를 쓰시고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신다. 이렇게 끊임없이 배워가면서 삶의 모든 부문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은 항상 우리들을 돌아보게 한다.내가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후 ‘나는 과연 나의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곤 한다. MBA 강단에 서서도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셨던 따뜻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직 한참 부족하겠지만 나를 통해 학생들이 내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달받을 수 있다면 교수로서, 학생들의 또 다른 아버지로서 깊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아버지의 가르침은 가까이 있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삶의 귀감이 되고 있다. 말이 아닌 온몸으로 늘 큰 가르침을 주시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서울대(경영학사)와 미국 노스웨스턴대(경영학석사), 하버드대(경영학박사)에서 공부했다. 한국경영학회의 편집위원장 및 한국마케팅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 SKK GSB 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