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무산되면서 이번 건이 어떤 식으로 결말날지 경제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서 이로 인한 불똥이 재계의 인수·합병(M&A) 전반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M&A 무산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한 자금 경색 사태가 과연 계약을 취소하거나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사정변경’에 해당하는지와 노조의 반발로 ‘정밀실사’를 할 수 없었는데도 본계약을 강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3150억 원에 달하는 이행보증금의 전액 몰취가 타당한 것이냐는 점이다. 한화그룹의 인수 무산에 대한 이유 있는 항변과 이에 대한 매각 주간사 산업은행의 반박 등을 보도한다.= “전쟁터에서 장수는 모든 장병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자리인데 군사들을 모두 사지(死地)로 내몰 수는 없다. 최근의 국제 금융 위기는 초유의 일인데다 개별 기업으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태여서 경영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최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임원들에게 밝힌 내용이다. 김 회장은 기업 M&A의 달인으로 불린다. 한화그룹 자체가 M&A를 통해 커왔다. 1952년 한국화약을 모태로 한 한화그룹은 1982년 다우케미컬,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및 한화 L&C), 1985년 정아그룹(현 한화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해 정상화했다. 한화그룹이 현재 35개 계열사에 연간 매출 23조~24조 원, 전체 종업원 2만3000명에 이르는 재계 10위권(공기업 제외)의 그룹으로 성장한 것도 이 같은 전략이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한화그룹은 3년간에 걸친 오랜 검토 끝에 대우조선해양을 그룹의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삼아 세계적인 조선 해양 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인수전에 참여했다. 우여곡절 끝에 포스코, GS 등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지난해 10월 24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돼 재계를 놀라게 했다.김 회장은 전쟁에 임해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고 후퇴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을 견지해 왔다. 그런 김 회장이 이번 대우조선해양 인수 과정에서 작년 10월 24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도 올 1월 21일 매각 주간사인 산업은행으로부터 우선협상대상자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은 “최선을 다했지만 여러 가지 불가피한 시장 상황 변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화그룹 측은 평가하고 있다. 그룹을 더 큰 재앙에 빠뜨리지 않기 위한 경영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인수무산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글로벌 금융 위기에 따른 자금 경색이고 또 하나는 정밀실사를 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한화그룹은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가 급속히 심화되고 그 충격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금융시장에 파급되면서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경제 상황 및 금융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조선업의 경기가 이로 인해 급속히 하락해 대우조선해양의 성장 잠재력이 훼손되고 해외 투자 자산의 부실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다.한화 측은 “당초 국내은행 3곳과 제2금융권 3곳, 그리고 중동계 해외 투자자 2곳 등이 이번 인수 건에 함께 투자하기로 확약했었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가 번진 뒤 모두 투자에 난색을 표했다”고 밝혔다. 모든 투자자들이 ‘아생연후(我生然後)’를 외치다보니 돈을 끌어 모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 M&A 추진 과정의 필수적 절차로 반드시 본계약 체결 이전에 시행해야만 하는 확인 실사를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저지로 인해 착수조차 하지 못했다.계약이 진행되는 동안 산업은행은 한화그룹이 노조 측과 미온적으로 교섭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화 측은 밝히고 있다. 한화그룹은 우선협상자 선정 이후 노조 측에 노조가 요구한 여러 사항 중에서 우선협상자 신분으로 확인해 줄 수 있는 부분인 ‘고용보장과 임단협 승계’를 약속하는 한편 인수 후 경영권 확보 뒤 ‘성과급 지급’ 요청도 적극 검토하겠다는 약속해 준 바 있다고 설명한다.그러나 주주들의 자산인 자사주를 노조원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해 달라거나 향후 일정 기간 동안 자산 처분을 금지한다는 등 경영권을 침해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인수 후보 기업도 수용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요구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런데도 산업은행은 인수 후보자에게 노조와의 사전 협의를 요구함으로써 원활한 실사가 이뤄지지 못한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한화 측은 주장하고 있다.결과적으로 한화는 최근 조선업의 경기 급락 여파로 인한 수주 취소와 신규 수주 전무, 잠재 부실 우려 등으로 대우조선해양의 실질 가치 및 자금흐름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인수 대상 기업의 실질 가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6조 원 이상의 초대형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에 처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도 한화는 계약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기 위해 해외 재무적 투자가와 계속 접촉하는 한편 국내 금융사들의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악화되는 금융 환경 속에서 입찰 당시 금융사와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마련하기로 했던 만큼의 자금 마련이 어려워지게 됐다. 이 부분이 총 인수 금액 6조3000억 원 가운데 약 40%에 해당된다.이에 한화그룹 인수 컨소시엄인 (주)한화 한화석유화학 한화건설 등 3사는 이사회를 열고 ‘선실사 후계약’, ‘인수 대금 분납과 납입 기한 연기 또는 주식 분할 매각’ 등 이 거래를 종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산업은행과 합의할 것을 의결했다. 대우조선해양의 조속한 민영화와 경영 안정화를 꾀하고 한화컨소시엄의 재무적 위험도 최소화해 매도자와 매수자, 나아가 국가 경제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밝혔다.그러나 자산 가치 하락으로 입찰 당시 예상했던 자체 자금 마련 계획도 불투명해짐에 따라 우량 계열사를 추가로 매각하기로 하는 등 그룹이 보유한 우량 자산(대한생명 주식 일부, 본사 사옥을 비롯한 부동산, 우량 계열사 등) 매각에 나섰다. 인수 자금의 60%를 자구 노력으로 우선 충당하겠다는 주식 분할 매입 계획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해 산업은행에 제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인수는 무산으로 치닫게 됐다.= 최근 증권시장에서는 한화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종안을 갖고 협상한 뒤 더 이상 무리해 계약을 추진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결정이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만약 한화가 무리하게 계약을 추진할 경우 그룹 전체에 큰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화그룹이 어려워질 경우 국가적인 부담도 커지게 됐을 것이라고 증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는 주가가 대변하고 있는데 이번 계약이 무산된 이후 한화그룹 주식의 시가총액은 6000억 원 이상 증가했다.이번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 건에 대해 김 회장은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이라고 밝혔다. 다만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딜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매각 주간사인 산업은행의 경직적인 태도도 주요 원인 중 하나라며 한화 측은 이미 납부한 3150억 원의 이행보증금(전체 매각 대금의 5%)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한화는 지난 1월 23일 이사회를 열고 이 같은 산은의 책임을 주장하면서 주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이행보증금 반환을 위한 제반 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한 상태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매각을 실무적으로 총지휘했던 산업은행의 한대우 기업금융4실장은 “양해각서를 체결할 당시에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조짐이 있었다”며 “이번 글로벌 금융 위기를 사정변경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노조의 반대로 실사를 하지 못한데 대해선 “실사가 여의치 않을 경우 본계약을 먼저 하고 나중에 실사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반박했다.매각 과정이 너무 경직적인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금 조달 여건이 어려워진 것을 감안해 사모 펀드(PEF)를 통한 자금 조달을 제안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며 “공공 딜(Deal)이든 민간 딜이든 M&A 시장에선 지켜야할 룰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화는 이번 이사회 결의대로 이행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화해나 조정으로 귀결되면 좋지만 법정 다툼 가능성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한화 측 관계자는 “아직 법무법인을 선정할 단계는 아니다”며 “적정한 조건으로 화해나 조정이 이뤄지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장일형(57)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부사장은 그룹의 대외 접촉 창구 역할을 총괄하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와 예일대 대학원(경제학 석사)을 나온 그는 행정고시를 거쳐 국무총리실 산업자원부 등에서 근무한 뒤 삼성전자 임원을 거쳐 2005년 한화그룹으로 옮겨왔다.이번 인수가 무산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공부문의 입찰이 가지는 경직성과 같은 한계를 들 수 있다. 만약 이번 건이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부문의 계약이었다면 충분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수정안으로 합의했을 것이다.게다가 정밀실사도 하지 못했는데 본계약을 강요하는 게 말이 되는가. 작은 집을 살 때도 여러 번 살펴보고 하자가 있는지 점검한 뒤 계약하는데 수조 원짜리 딜을 한 번도 실사도 하지 않고 덜컥 계약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당초 국내외 투자자 8개사 및 기관이 앞 다퉈 투자하겠다고 했다가 한꺼번에 취소한 게 바로 그것이다. 어떤 M&A에서 이렇게 일시에 투자자들이 물러설 수 있는가. 글로벌 금융 위기에 따른 이 같은 사태가 바로 불가항력이나 사정변경 사유에 해당한다고 확신한다. 자연재해인 지진 화산 폭발, 태풍은 수시로 발생하지만 이번 위기는 10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사태이기 때문에 자연재해보다 더한 경제 분야에서의 불가항력이라고 본다.한화는 기본적으로 M&A를 통해 커 왔고 이 분야에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다. 특히 한화의 주력 사업 분야는 석유화학인데 한국의 석유화학 업체들은 중동 중국과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조선과 해상 플랫폼 자원 개발 등으로 확대해 가면 그룹 전체의 시너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지금은 조선 분야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이를 인수할 경우 조선 분야는 50%를 유지하고 나머지는 해상 플랫폼이나 자원 개발 등으로 다각화할 생각이었다.우리는 딜을 성사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각자의 합리적인 협조가 안 돼 딜이 깨진 만큼 이행보증금을 받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법정 다툼으로 가기에 앞서 화해나 조정을 통해 합의를 보길 기대한다.취재= 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사진= 김기남 기자 doon1549@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