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이영칠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오전 11시.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밝은 웃음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지휘자 이영칠이다.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의 한 커피숍에 나타난 그는 호텔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클래식은 세계 공통 언어라고 할 수 있죠.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음악으로는 모든 나라 사람들과 통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앙코르곡으로는 한국 곡을, 협연자는 한국 연주자를 선정하려고 합니다. 클래식을 통해 한국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국내 음악계에는 아직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영칠은 이미 유럽에서 그 실력과 재능을 인정받은 오케스트라 지휘자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종신 객원 지휘자, 체코 보헤미안 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불가리아),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러시아), 등 동유럽 10개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동했다. 주요 활동 무대인 유럽에선 그를 모르는 아티스트들이 없을 정도다.“1년에 40회 정도 연주합니다. 보통 3~4일 정도 하는 리허설 등을 합치면 1년에 약 160일을 지휘하는 셈이죠.”지휘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3년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짧게 느껴진다. 본래 그의 꿈은 호른 연주자였다. 1989년 미국 유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호른 연주자의 꿈 때문이었다. 미국 뉴욕 메네스 대학에서 1996년과 1997년 각각 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2000년 뉴욕 주립대학에서 연주학 박사를 수료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그의 꿈을 바꿨었다.“안정된 삶이란 죽은 삶과도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해 왔죠. 그런데 연주할 때마다 오케스트라의 전체적인 음악을 듣고 싶었어요. 또 만약 이 곡을 직접 지휘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했습니다. 새롭게 도전하고 싶었죠.”지휘자의 삶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이영칠은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종신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2007년에는 보스니아 사라예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상임지휘자, 작년에는 체코 프라하 보헤미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서게 됐다.그를 인정해 주는 유럽 음악가들도 많다. 체르니기프 지역 봄 페스티벌인 시베르 음악회를 주최하는 총 음악 감독 미카엘 수카츠는 지휘자 이영칠을 “내가 본 지휘자 중 최고”라고 칭찬했고 이 내용을 담은 기사가 우크라이나 체르니기프 지역 저녁 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또 3월 29일에는 국내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현지에서 모스크바 스테이트(Moscow State)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스크바 중심 메르디앙 홀에서 초청 연주를 했다. 이 공연은 TV와 러시아 라디오 프로그램 ‘러시아의 소리(voice of russia)’ 등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 방송될 예정이다.만 5년 만에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동 무대를 넓힐 수 있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항상 자신의 일을 즐겼다는 점이다. 지휘하는 순간마다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게 됐다. 항상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던 것도 한몫했다. ‘후회하는 일을 하지 말라. 최선을 다하면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평소 가치관이다.“20년 동안 낮잠을 자 본 기억이 없어요. 리허설과 연습이 쉴 시간 없이 계속 이어졌죠. 하지만 전 그 순간순간을 즐기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이것이 제가 단기간 안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하지만 역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휘를 막 시작한 시절, 매번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연주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고 설레었지만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무시, 차별 등과 싸워야만 했다. 힘든 고난을 피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만 그는 역경을 피하지 않고 부닥쳐 가며 극복했다. 노력 끝에 결국 실력을 인정받게 됐고 세계적 수준급의 아티스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클래식도 스포츠 등과 마찬가지로 후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클래식도 마케팅 전략이 있어야 빛을 발휘할 수 있어요. 아무리 좋은 클래식 음악이라도 후원해 주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그게 참 가슴 아프죠.”실제로 세계적 피아니스트 ‘랑랑’은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세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됐고,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지휘자 두다멜을 배출해낸 베네수엘라는 ‘엘 시스테마’라는 프로그램(빈민가 청소년들을 위험한 길에서 구원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치는 시스템)으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성장시킴으로써 전 세계의 이목을 받고 있다. 이 모든 성공 뒤에는 그 나라의 기업과 정부의 후원이 있었다고 지휘자 이영칠은 설명했다.그가 매니지먼트사 EU메노뮤직을 직접 열게 된 계기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연주가들은 자신의 연주에만 전념해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직접 운영하고 있다. EU메노뮤직은 아티스트들을 후원해 주는 매니지먼트사다.“잠재력 있는 음악가들도 길을 몰라 쉽게 좌절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또 그 길은 어렵지 않고 의외로 쉽게 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죠.”그는 올해 초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오케스트라 초청 지휘 연주와 러시아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 연주 등을 마치고 영국 런던 ‘카도간’홀에서 로얄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 연주를 할 예정이다. 또 돌아오는 11월에는 소피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의 지휘자로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도 설 계획이다.빡빡한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했다.“지휘하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실감나요. 지휘하기 전에는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지휘를 하게 되면 저절로 힘이 나요.”그의 클래식에 대한 애절한 사랑만큼 우리나라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클래식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약력: 1970년생. 90년 미 메네스대 호른 연주학과 졸업. 2000년 뉴욕주립대 연주학 박사학위 취득. 현재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종신 객원 지휘자, 체코 보헤미안 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김선명 기자 kim069@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