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기술 따라잡는 민간기술

미군이 일본 소니의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을 대량 구매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경제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12월 12∼18일)에서 ‘군사·민간복합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데다 최근 들어 민간기술의 군사기술 전용화 추세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그동안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은 상호간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지만 기술 주도권은 주로 군사기술 쪽에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민간기술의 발전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이 같은 전통적인 트렌드에 역전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일반인들의 사회생활에서 필수 불가결한 기기들의 상당수는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된 제품들이다. 초기 컴퓨터 상당수는 적국의 암호를 해독하거나, 핵폭탄의 폭발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개발됐다. 인터넷 역시 초기에는 군사적 용도에서 개발된 것으로, 군사적 용도의 틀을 벗어나 민간에게 이식된 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범위로 성장했다. 이제는 운전의 필수품이 된 내비게이션도 원래는 군대와 군함, 미사일 등을 정확한 위치로 보내기 위해 인공위성을 활용하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이처럼 그동안 대부분의 첨단 기술들은 군용 목적으로 먼저 개발된 뒤 민간에 퍼져나가는 형태를 띠었다. 이는 자금력이 풍부한 군사 부문에서 비싸고 혁신적이면서 실험적인 기술들을 별 부담 없이 민간보다 먼저 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하지만 최근 들어선 일반 시민사회에 먼저 도입된 기술들이 군사 부문으로 넘어가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 공군이 소니의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2200대를 구입한 것이다. 이미 가정용 게임기를 통해 실제 조종석 안에 앉아서 전투 비행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게임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미 공군의 전투 수행 방식이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엘리트 ‘탑 건’이 멋들어진 전폭기를 타고 적진으로 날아가는 방식에서 무인 폭격기로 컴퓨터 게임하듯 게릴라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변모한 덕분에 게임기가 핵심 군사 연습 장비가 돼버린 것이다. 실제 줌과 열감지 기능이 달린 카메라로 3km 상공에서 사람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는 무인 폭격기 프레데터는 게임방과 같은 느낌이 나는 원격 조종석에서 조이스틱을 이용해 조종되고 있다.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도 전투 로봇과 무인 전투기 조종 연습에 활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미군들에게 애플사의 아이팟과 아이폰은 소총 못지않게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돼 버렸다. 아이팟과 아이폰에 현지어 통역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현지인들과 일종의 필담을 통해 의사소통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야전군들이 적진에 포사격을 하기 위한 탄도 계산에도 아이팟이 이용되고 있다.후방의 지휘사령부와 군사 장비 생산 업체에선 최신 그래픽칩과 PC 비디오 카드가 신제품의 성능을 시뮬레이션하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이코노미스트는 군사기술과 민간 기술의 유입과 유출에서 이 같은 변화가 생긴 이유로 일반인용 산업 기술의 빠른 증가세를 들고 있다. 여전히 첨단 기술 수요에서 군사 부문은 연간 1조5000억 달러의 돈을 쓰고 있어 7000억 달러에 불과한 민간 부문을 압도하고 있지만 군사 수요가 기술 진전을 이끄는 부분은 급속히 축소됐다는 분석이다. 군사 분야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민간 부문에서 훨씬 복잡한 기술 혁신에 대한 수요가 있고, 이것이 민간 부문의 기술 주도 현상의 기반이 된다는 설명인 것이다.실제 전 세계 민간 시장에선 연간 10억 대 이상의 휴대전화가 판매되면서 무선통신 및 데이터 송수신과 관련된 첨단 기술 진보를 주도하고 있다. 더 성능이 좋으면서도 더 싼 제품을 찾는 시장 경쟁을 통해 군사기술 부문을 추월하고 격차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민간 사회에서 사용되는 각종 첨단 기술들이 탱크와 헬리콥터를 대체해 버리지는 못할 것이지만 민간기술이 군사기술에 침투하는 것은 여러 이점이 있다”며 “아이팟을 이용해 이라크나 아프간 현지인과 의사소통하는 게 별도의 무선 소통 장비를 만드는 것보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김동욱 한국경제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