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현대판 ‘농토’…성장을 허하라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 경제다. 정부는 공공·노동·금융·교육개혁을 경제성장과 활력 회복을 위한 주요 개혁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 협조가 충분하지 않아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지만 설령 이 개혁 과제들이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기업 정책에 대한 대전환 없이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부 정책은 생산요소별로 개혁 과제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 지식·기술 등의 생산요소 시장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활용해 궁극적으로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서야 하는 기업 부문에 제대로 성장 동기가 부여되지 못하면 개혁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제는 대장간 기업밖에 없던 농경사회 시장경제에서 현대식 주식회사 형태가 등장하면서 창발한 독특한 경제체제다.
그래서 필자는 자본주의 경제는 현대적 기업이 농경사회 농토의 역할을 대체한 기업 경제라고 봐야 옳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선진 경제 국가는 인구의 대부분이 농토를 벗어나 기업 조직에 인생을 의탁하고 사는 경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을 제거한 결과는 현대식 기업을 국유화했던 사회주의 경제가 몰락한 후 모두 농경사회로 역주행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학은 생산요소만 잘 공급하면 시장이 다 알아서 성장과 발전을 가져온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사실은 기업이라는 조직 없이 불완전한 장마당 시장만으로는 산업화도, 창조경제도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도 이를 가치 있는 재화로 전환할 수 있는 역동적인 기업 조직이 없으면 창조경제는 불가능하다.


잘하는 기업 역차별하는 ‘n분의 1’ 방식
기업의 성장 동기를 살려내는 정책은 우리 경제 회복의 관건이다. 한국은 그동안 성장하는 기업에 절대적 혹은 상대적 불이익을 줌으로써 그들의 성장 동기를 차단하는 특이한 기업 정책 체제를 유지해 왔다. 사실상 오늘날의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 분배 악화 등 한국 경제의 많은 문제들이 거의 모두 이런 잘못된 기업 정책에서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경제의 성장은 궁극적으로 기업 성장에서 오는 것이며 기업 부문의 성장 동기가 약화되면 다른 어떤 정책을 써도 경제성장 동력을 살릴 길이 없다. 이제라도 기업 정책을 지금의 성장 유인 차단 정책에서 성장 유인 극대화 정책으로 전환해야 경제개혁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중소기업의 성장 유인을 극대화하는 중소기업 육성 정책도 시급하다. 그동안의 중소기업 육성 정책은 성과에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지원하거나 혹은 성과가 부진한 기업을 더 우대하는 n분의 1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은 사회·정책적 지원으로 변질돼 오히려 잘하는 기업을 역차별함으로써 중소기업들의 성장 동기를 차단해 왔다.
이제는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성장 친화적 정책으로 전환해 성과가 우수한 기업이 더 지원받아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 제도와 정부 지원 정책을 성과에 따른 신상필벌의 차별화와 시장 원리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 또 중소기업 간 인수·합병(M&A)을 활성화해 우수하고 강한 중소기업들이 좀비 기업들을 흡수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해 중견·대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기업 부문에선 국내 독점화를 조장하는 국내 투자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그동안의 경제력 집중을 우려한 대기업 성장 억제 정책은 사실상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기업의 성장 유인만 차단해 불행하게도 한국 경제 전체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켜 왔다. 상호 진입을 억제하는 대기업에 대한 투자 규제는 성장 유인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기업들의 국내 독점력만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한국의 대기업 생태계는 피나는 경쟁도 없고 성장의 유인도 사라진 채 정부 규제가 보호(?)해 주는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형국이 됐다. 물론 수출은 국제 경쟁의 압력에 노출돼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 압력을 받고 있기는 하다. 여기에 중소기업이 반(反)신상필벌의 지원 속에 안주하면서 성장 유인이 사라지다 보니 대기업 규제에도 불구하고 경제력 집중 완화는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기업에 대해서도 투자에 대한 규제를 획기적으로 자유화해 기업 부문의 경쟁과 성장 유인을 살려내야 한다.
새로운 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은 경제력 억제보다 경제력 남용 유인을 차단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기업이 경제력을 남용할 능력과 이를 실제로 남용할 유인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는 정책이 너무나 오래 남용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발전을 이끌 수 있는 기업 정책의 요체는 성장 유인을 극대화하되 성장하는 우수 기업들의 경제력 남용의 유인을 극소화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아예 기업의 성장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오랫동안 경제성장 정체와 양극화의 씨앗을 키워 온 것이다.


경제력 남용 무서워 성장의 싹 잘라서야
경제력은 강한 능력이 있는 기업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하지만 그 힘은 또한 항상 남용될 소지가 있다. 남용 유인을 어떻게 최소한으로 억제할 것인지가 기업 정책의 요체다. 실재하거나 잠재적인 경쟁자의 존재가 가장 강력한 경제력 남용 유인의 견제 장치란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새로운 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대기업의 신규 사업 진입과 투자를 자유화해 상호 견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기업 간 실제 담합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담합을 초래할 수 있는 업계의 각종 조합, 단체 활동이 담합을 조장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이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기업의 크기·분야·지역에 따른 차별적 투자 규제 장치들도 모두 털어내야 한다. 이를 통해 대기업의 실제 및 잠재적 경쟁을 극대화해야 한다.
또한 이미 지적했듯이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경제적 차별화에 기초한 성장 유도 정책으로 전환해 하루빨리 중견·대기업으로 성장, 대기업에 새로운 경쟁 압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도 충분하지 않으면 내수 독과점 부문에 보다 적극적인 해외 우수 기업 유치 전략을 천명해 추가적인 잠재 경쟁 압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경제력 남용 유인의 차단과 경쟁 촉진 정책으로 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면 최고조의 경쟁 압력 하에 기업의 성장 유인을 극대화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살려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업은 현대판 ‘농토’…성장을 허하라

좌승희 (전 한국경제연구원장·영남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