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수 현대경제연구원장

12월 4일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연차총회에서 감산 합의가 불발됨에 따라 국제 유가가 7년 만에 배럴당 4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최근의 유가 하락은 셰일오일 등 공급 증가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기 둔화와 대체에너지 증가에 따른 오일 수요 감소가 동반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유가 하락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베네수엘라·브라질·러시아 등 석유 수출 의존도가 큰 산유국들은 유가 하락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산유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도 저유가에 따른 물가 하락이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가 하락이 경기 회복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한국은 어떨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은 에너지 가격 하락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유리한 측면도 있다. 과거 30년 이상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한국이 3년 동안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구조적인 일본의 대규모 대세계 무역수지 흑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결된 1985년 플라자합의 직후 3년이다. 그 당시 한국이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에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라는 3저(低)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들은 아니었고 대외적인 여건이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지금의 저유가·저금리는 당시 상황과 비슷하지만 달러화가 강세라는 점은 차이가 있다. 또 당시 한국의 대외 부채가 경제 규모에 비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점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세계 경기가 지금과 같은 불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외 수요가 충분히 뒷받침됐다는 점이다.

유가 하락에도 웃지 못하는 이유
통상적으로 국제 유가 하락은 국민소득 증대와 물가 하락에 따른 소비와 생산 증대 효과 이외에 불확실성 저하에 따른 기업 투자 심리 개선을 통한 투자 증대를 유발, 원유 수입국의 경기 개선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 유효수요 부족 및 저물가 현상 지속에 따라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구매력 상승, 소비·생산·투자 증가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유가 및 단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유효수요 부족에 따른 생산 및 수출 물량 감소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유가 하락의 파급효과는 대외적인 리스크와 대내적인 리스크로 나눠 볼 수 있다.
저유가 시대의 대외적 리스크는 무엇일까. 먼저 산유국 경기가 급락하면 산유국에 수출하는 한국 같은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원유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브라질·인도네시아 등 신흥국들의 재정난과 외환 부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러시아의 신용 부도 스와프(CDS) 프리미엄(12월 4일 기준)은 전날보다 1.92bp(1bp=0.01% 포인트) 오른 285bp를 기록했고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도 달러당 68루블로 급등(지난 1년 사이에 루블화는 43% 이상 평가절하)했다. 유가 하락이 지속되면 디폴트 상황까지 내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브라질도 1년 사이에 통화가치가 40% 이상 급락했고 물가 상승률은 10월 기준 9.9%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은 3분기 기준 마이너스 4.5%(전년 동기 대비)로 통계 산출 이후 최악을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올해 재정수지 적자가 GDP의 19.5% 수준인 13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러한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지난 6개월 사이 700억 달러에 이르는 해외 오일 머니를 회수했다.
원유가 수출의 90%를 넘게 차지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도 재정수지 적자가 GDP의 25%를 넘어섰고 160%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100억 달러대 수준에 불과한 외화보유액 등으로 극심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경기 둔화에 따른 원유 수요 감소와 함께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 자원 수출국의 위기는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를 상당히 완만하게 이끌어 갈 수밖에 없도록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저유가와 ‘3저 호황’의 추억
‘발등의 불’만 보면 안 돼
저유가 상황이 지속될 경우 대내적인 리스크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수출 감소와 이에 따른 주요 산업의 구조 변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국책 연구 기관 5곳이 발간한 ‘유가 하락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 유가가 배럴당 63달러를 유지하면 한국에 약 30조 원의 실질소득 증대 효과가 있고 원유 수입비용도 300억 달러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국제 유가는 앞선 전제 조건의 절발 수준인 30달러대까지 하락해 저유가의 긍정적 효과가 대부분 상쇄되고 있다. 특히 저유가로 세계적인 유효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수출 단가가 하락해도 수출 물량이 늘지 않아 한국의 수출이 부진한 상황이다.
저유가가 지속되면 석유화학 및 정유·조선 등 주요 산업의 구조 변화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석유화학은 유가 하락이 장기화되면서 정제 마진 증가로 최근 실적이 개선됐지만 장기적으로는 판매 가격이 낮아지면서 오히려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조선도 최근 국내 주요 업체가 주력하고 있는 해양 석유 개발 위주의 해양 플랜트 수요를 상당 부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 정유 업계도 매출액 감소 및 수익성 악화 등으로 투자 여력 감소와 신용 등급 하락이 우려된다.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고유가 시절에 주목받았지만 저유가가 지속된다면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저유가 수혜 산업으로 꼽히는 자동차도 러시아·중동 등 에너지 수출국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 대한 수출 부진이 예상된다. 건설도 여의치 않다. 올 12월 기준으로 한국의 대중동 지역 건설 수주액은 작년 동기 대비 52% 감소한 147억2600만 달러에 그쳤다.
저유가의 대내외적 리스크가 산적한 상황에서 지금의 상황을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어렵기는 하지만 고유가 시절보다 한결 낫다고 보는 편이 맞다. 상황은 다르지만 플라자합의 직후 호황기에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에너지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만 급급해서는 미래가 안 보인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