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이 되면 텅텅 비어 있던 상가 앞쪽에 하나둘 천막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전주’, ‘제주’ 등의 푯말을 따라 여행 가방과 커다란 비닐 뭉치 등이 겹겹이 쌓인다. 일명 ‘사입삼촌’이라고 불리는 짐꾼들이 자기 몸집보다 더 큰 옷더미를 짊어지고 매장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낮 동안 텅텅 비어 있던 쇼핑몰 내부도 분주해지긴 마찬가지다. 청평화시장에 있는 여성 의류 도매 판매점 ‘낭만고양이’ 관계자는 “전국 각지의 소매점, 온라인 쇼핑몰 사장이나 패션 브랜드 등에서도 MD 담당자가 찾아온다”며 “조금이라도 더 품질 좋고 저렴한 옷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 도매 상가의 임대료는 건물마다 차이가 큰 편이다. 현재 신평화시장은 점포 5㎡(약 1.5평)당 보증금 5000만~7000만 원에 월세 100만~150만 원이다.
동평화시장은 점포 5㎡당 보증금 2000만~3000만 원에 월세 40만~50만 원으로 근처 상가 중 시세가 가장 낮다. 청평화시장은 5㎡당 보증금 7000만~8000만 원에 월세 300만 원이고 디오트는 5㎡당 월세 400만 원에 보증금 1억 원으로 시세가 가장 비싸다. 대부분의 점포는 권리금이 없고 층별로 임대료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오트와 청평화시장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인기 매장이다. 인근 삼성부동산의 장종봉 대표는 “청평화시장과 디오트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디자이너들이 모여드는 패션 창업의 메카”라며 “이곳 상인들의 평균 연령대는 20~30대로 샘플 작업도 제일 빠르고 가격도 제일 저렴한 도매 상가”라고 소개했다.
김종철 청평화시장상인연합 회장은 “이곳에서 잘나가면 하루에 3000~5000장도 판매한다”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시즌 첫 디자인은 20여 종, 그 후에도 매주 2~3개씩 신상 디자인을 선보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곳은 매장마다 2~3명의 디자이너가 힘을 합쳐 함께 일하는 곳이 많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동대문 상권에 여전히 ‘젊은 디자이너’들이 몰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도 6만 개 이상씩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디자인이다.
인근에 원단이나 부자재를 구매할 수 있는 종합 상가와 봉제 공장이 있다는 것도 동대문 상권의 강점이다. 그만큼 빠른 시간 안에 의류 생산이 완성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트렌드를 반영하는 데도 보다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패션 창업의 꿈을 품은 젊은 창업자들의 열정에 힘입어 동대문 상권은 겉으로는 정체된 듯 보여도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고객군의 확대다.
초창기 동대문 도매 상권의 주요 고객은 동대문 소매 상가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소매 상가를 대상으로 했지만 2000년대 들어 이곳의 주 고객은 온라인 쇼핑몰로 바뀌었다. 그러다 5~6년 전부터 동대문 상권을 찾아오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도매 상가 내에서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소매 판매 또한 활성화되고 있다.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이었던 동대문 도매 상권이 B2C(기업 대 소비자 거래)로 성격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실제로 밤 11쯤이 되면 이곳 도매 상가 앞에는 중국말로 된 푯말이 세워진 임시 물류센터가 곳곳에 눈에 띈다.
‘유어스’나 ‘디자이너스클럽’ 같은 의류 상가에서는 중국어로 된 안내 방송이 한국어보다 더 자주 흘러나온다. 이곳에서 만난 한 도매 상가 관계자는 “아직도 매출의 80% 정도는 국내 소비자들이 차지할 만큼 국내 비중이 높긴 하지만 중국 도매 상인들에 대한 비중이 점점 높아져 가는 추세는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권강수 한국창업정보원 이사는 “동대문 상권이 글로벌화하면서 도매 상가들 또한 점차 글로벌하게 변화되는 과정”이라며 “향후에는 도매 상가들 역시 동남아시아나 중국 시장에 대한 비중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동대문 일대가 ‘글로벌 패션 상권’으로 진화할 잠재력이 높다”고 분석했다.
“외국인 관광객 의존도 높아”
의류·패션 도매시장과 패션 쇼핑몰(상업 시설)로 대표되는 동대문 상권은 서울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북단)과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그리고 청계천과 디자인플라자 주변 블록을 범위에 넣을 수 있다. 일반적인 서울 시내 상권과 달리 로드 점포가 많지 않은 반면 쇼핑몰과 도매시장 내에 내부 폐쇄형 소점포가 밀집한 것이 특징이다.
이 상권의 가장 큰 장점은 쉴 틈 없이 공급되는 엄청난 유동인구다.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지면서 과거 그 주변에 포진해 있던 점포들은 현재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여전히 장충단로 동쪽 1층 상가에서 스포츠 의류 매장이나 야구용품, 자전거 용품점 등이 활발하게 영업 중인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과거 스포츠 용품과 의류 매장이 번성했을 당시에는 10억 원에 육박하는 권리금 시세를 자랑했던 곳이다. 현재는 이들 스포츠 매장 중 상당수가 커피 전문점과 음식점 중심으로 업종이 변경되면서 임대료가 올라 권리금 시세는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동대문 상권의 미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근에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등이 늘어난다는 점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한류 열풍과 연예인 마케팅, 면세점(두산), 관광산업을 집약한다면 상권이 예전처럼 부활할 가능성이 높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