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2년 넘게 탄자니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만난 아이들은 많이 달랐다. 낡기는 했지만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재잘재잘 해맑게 떠들며 걸어가는 학생들을 어디서든 만날 수 있었다. 아직도 가난하고 발전이 더딘 아프리카, 적도의 아프리카도 희망은 아이들이다.
“꾸륵, 꾸륵, 꾸르륵.” 홍학 떼의 붉은 날갯짓으로 유명한 레이크 마냐라(Lake Manyara) 국립공원. 홍학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울음소리가 호숫가에 울려 퍼진다.
사파리 전용 차량이 빼곡한 이곳에 중고 미니버스가 나타났다. 생뚱맞은 등장에 모두의 눈길이 쏠린다. 기우뚱, 기우뚱 흙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미니버스. 이내 버스 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검은 피부의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홍학의 울음소리도 잠시 묻혀 버렸다.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탄성을 지르며 호숫가의 구름다리로 달려간다.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햇빛 아래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은 보석처럼 빛난다.
탄자니아 학생들은 국립공원으로 소풍을 간다. 우리네 학생들이 경복궁이나 창경궁으로 현장학습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 레이크 마냐라 국립공원이나 타랑기레(Tarangire) 국립공원은 도시인 아루샤에서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 오래돼 동물들도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렇지 않게 풀을 뜯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끼리, 기린 등을 편하게 볼 수 있으니 소풍 장소로 인기 만점이다.
지붕이 열리는 멋진 사파리 차량은 아니지만 22인승 미니버스에 옹기종기 끼어 앉아 사파리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신이 나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 동물들을 보는 건 세상 어디에서나 좋은 구경인가 보다. 에버랜드에 소풍을 온 한국 학생들도 이렇지 않을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한국 학생들 같았으면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 없을 텐데, 그 흔한 카메라 셔터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천혜의 자연이 펼쳐진 탄자니아라, 이 정도쯤은 너무나 흔해서 특별히 찍지 않는 걸까. 아니다. 자세히 보니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학생이 아무도 없다. 안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없어서 못 찍는 거였다. 카메라는 가난한 이곳 학생들에겐 너무 고가의 전자제품이다. 한국에선 초등학생도 최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만 이곳에서는 전화만 되는 흑백 휴대전화도 사치다.
아프리카에 산다고 해서 매일 사파리 동물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탄자니아에는 국립공원이 16개나 되지만 학생 단체 외에 국립공원을 찾는 현지인들은 아주 드물다. 부대시설 요금이 외국인 기준에 맞춰져 있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이 학생들에게는 아마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국립공원 나들이가 될지도 모른다. 평생 한 번인 국립공원 소풍일지도 모르는데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다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섭섭할까.
하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동물들의 재롱에 빠진 아이들은 미래의 추억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카메라가 있든 없든 이 순간을 즐긴다. 바오밥나무의 크기에 입을 쩍 벌리고 “저기, 코끼리!”, “옆에 기린!”을 연신 외쳐대며 옆에 앉은 친구를 흔드느라 호들갑이다.
탄자니아 아이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건 비단 사파리 소풍만이 아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교복도 마찬가지다. 현지 아이들은 80~90%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까지만 다닌다. 10명 중 9명의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그중 단 1명만이 중등학교(중·고등학교가 합쳐진 교육과정)로 진학하기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에겐 초등학교 때 입어보는 교복이 마지막 교복이다.
탄자니아에선 초등학교부터 교복을 입는다. 교복은 통상 파란색 또는 검은색 바지(또는 치마)에 초록, 노랑, 흰색 셔츠다. 물론 다 단색이다. 간혹 상하의 모두 분홍색인 경우도 있지만 탄자니아 국기 색인 초록, 노랑, 파랑을 선호한다. 탄자니아 정부에서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아직 가난한 이 땅에선 아이들마저 공부보다 일을 시켜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손을 돕느라 학교에 자주 빠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만다. 중등학교는 큰 마을에나 가야 있으니 더더욱 다니기 힘들다. 중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가는 건 공무원이나 부유한 인도 상인들의 자녀들뿐이다.
탄자니아 학교에서 가장 골치 아픈 학생은 마사이족이다. 사고를 쳐서 그런 게 아니다. 툭하면 학교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사이 학생들은 출석률이 가장 나쁘다. “오늘은 소가 아파서요.” 그게 학교를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유목민이었던 마사이에게 소는 전 재산이자 또 다른 가족이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위해 학교에 가는 것보다 당장 자신들의 ‘가족’을 돌보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마사이에게는 내일을 위해 공부하는 것보다 ‘오늘’이, 그리고 가족이 더 중요하단다.
마사이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제대로 보내지 않는 ‘나쁜 부모’가 된 것은 유럽 열강들 때문이다. 넓디넓은 초원에서 소를 몰며 발이 닿는 대로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탄자니아인이 됐고 옆 움막에 살던 친구는 케냐인이 됐다. 어제처럼 소에게 물 먹이러 가는데 여기서부터는 다른 나라 땅이니 오지 말라고 한다. 이는 모두 유럽 열강들이 식민 통치를 위해 아프리카 지도 위에 자를 대고 반듯하게 그린 선이 국경이 된 이후부터다.
아직도 마사이에겐 ‘국가’의 개념보다 ‘종족’의 개념이 더 강하다. 그들에겐 국가의 학교보다 종족의 학교가 더 필요하고, 현대 문명보다 유목에 요구되는 자신들의 관습과 자연이 주는 교훈이 더 중요하다.
알록달록한 가방을 멘 아이들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OO어린이집’, ‘OO어학원’…. 서울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이 아니다. 탄자니아 아루샤 시내의 한낮 풍경이다. 탄자니아 길거리에선 한글 로고의 가방을 멘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1년이 지나면 더 이상 쓸 일이 없는 ‘유치원 가방’. 아파트 단지 앞 재활용 수거함에 넣어진 이 가방들은 산 넘고 물 건너 아프리카까지 온다.
한국의 유치원 가방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에게도 인기가 많은 ‘패션 아이템’이다. 이 알록달록하고 앙증맞은 가방은 화려한 원색을 좋아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취향에 딱이다. 커다란 금색의 장신구를 하고 ‘OO병설유치원’이라고 새겨진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프리카의 패셔니스타들, 사실 유치원 가방이란 걸 말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글 가방’을 메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학생들. 학교가 끝날 시간도 아닌데 교문을 빠져나온다. 혹시 ‘땡땡이’치고 나와 나쁜 짓이라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유심히 지켜보니 아니다. 점심을 사 먹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오는 거다.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가 대체로 그렇듯 탄자니아 학교에도 급식시설이 없다. 아침마다 부모님에게서 받는 용돈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현지 식당의 밥 한 끼는 3000탄자니아 실링, 한화로 1000원이 조금 넘는 돈이지만 이곳 학생들에겐 너무나 큰돈이다.
아이들이 받는 하루 용돈은 500~1000탄자니아 실링. 제대로 된 점심은 꿈도 꿀 수 없다. 학교 주변 식당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500탄자니아 실링짜리 감자튀김을 사 먹거나 300탄자니아 실링짜리 바나나로 해결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달라달라(현지 봉고차 버스)’라도 타야 하는 날이면 점심은 영락없이 바나나 하나로 때워야 한다. 오늘도 열심히 학교에 가는 이 아이들의 꿈은 무엇일까.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아니면 돈 많이 버는 상인이 되길 바라지만 아이들의 우상은 축구선수다. 한국에선 아이돌 가수가 인기지만 탄자니아 학생들에겐 축구선수가 최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수는 자국 선수가 아닌 저 멀리 바다 건너 있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탄자니아에선 축구의 인기가 매우 높다.
아무리 허름한 학교에도 축구 골대는 꼭 있다.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케이블 TV가 있는 음식점에 몰려가서 마치 자국 경기인 양 열심히 응원을 한다. 유럽 축구 리그에서 뛰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면서.
한국에서 엄마의 마음이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곳은 수학능력검정시험 날 교문 앞이다. 대학 진학률이 낮은 이곳 탄자니아에선 아이들이 입고 있는 낡은 교복에서 엄마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옷은 헤졌지만 셔츠도 치마도 구멍 났던 곳은 모두 깔끔하게 꿰매져 실밥 하나 삐져나온 곳이 없다. 아침저녁에 껴입는 교복 스웨터도 보풀은 가득이지만 얼룩 진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더운 아프리카에서 스웨터 교복이라니, 생각만 해도 더울 것 같지만 아루샤 현지 학생들에겐 필수품이다. 아루샤처럼 고도가 높은 지역은 일교차가 크다. 탄자니아의 등교 시간은 아침 8시. 집에서부터 걸어가려면 7시에는 나와야 한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셔츠로만 견디기엔 역부족이다. 탕가나 다레살람 같은 해안가 지역에선 반팔에 반바지를 교복으로 입는다.
간식으로 사탕수수를 입에 문 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지나가는 아루샤 중앙시장 ‘소코쿠(soko kuu)’의 한편에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 서너 명이 서성이고 있다. 이 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느라 바쁘다. 교복 차림도 아니고, 이들은 뭘 하는 것일까. 한 아주머니가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검은 비닐봉지를 흔든다. 다른 한 손엔 여러 장의 봉지를 둘둘 말아 쥐고 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바지에 사이즈가 안 맞는 큰 웃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아이들. 시장에서 비닐봉지를 파는 ‘시장 고아’들이다.
처음에는 우리 일행을 서너 발짝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그들이 소매치기인 줄 알았다. 지갑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해는 물건을 살 때 풀렸다. 토마토 가게에서 흥정을 마치자마자 작은 손이 잽싸게 비닐봉지를 내민다. 200탄자니아 실링 하는 비닐봉지를 팔기 위해 따라다녔던 거다. 이 아이는 30분 내내 따라다닌 수고(?) 끝에 비닐봉지 두 장을 팔았다. 소코쿠 터줏대감인 스티븐은 10년 넘게 시장에서 비닐봉지를 팔고 있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어머니와 살기 시작했지만 탄자니아에서 여자 혼자 일하며 아이까지 먹여 살리기는 힘든 일.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아지자 스티븐의 어머니는 그를 고아원에 보냈다. ‘밥은 주겠지’ 하는 생각이었겠지만 고아원 시설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스티븐은 결국 고아원을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찾을 수 없었고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에게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 길거리를 전전하다 찾아든 곳이 소코쿠. 시장에서 먹고 자며 상인들 틈에서 살다 보니 어느새 열아홉 살이 됐다.
쭈뼛쭈뼛하며 겨우 비닐봉지를 내밀던 스티븐은 이제 봉지 판매의 ‘고수’가 됐다. 손님 옆에서 같이 물건 값도 흥정해주고 짐을 들어주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비닐봉지도 팔고 덤으로 팁을 받기도 한다. 손님 한 명에게 받는 팁은 대략 1000탄자니아 실링 정도. 재수 좋은 날은 비닐봉지를 팔아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팁으로 모을 수 있다. 물론 손님이 없어 공치는 날도 허다하다. 스티븐은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가격도 잘 알고 좋은 과일도 귀신같이 골라낸다. 스티븐을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시장 아주머니들도 그가 값을 깎으면 모르는 척 넘어가준다. 왕고참이니 가끔 손님들을 귀찮게 하는 시장 고아들에게 군기도 잡고, 맡길 곳이 없어 데려온 아이랑 놀아주기도 해 친분이 두텁다. 함께 장을 보면 훨씬 싸고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스티븐은 소코쿠의 ‘인기 스타’다.
스티븐은 영어도 잘한다. 아주 유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장통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비닐봉지 장사를 하려다 보니 영어가 필요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영어가 아니다. 고아원을 나온 뒤로는 집도 없고 교과서나 교복 살 돈이 없어 학교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3년 쯤 전 할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같이 살게 됐지만 할아버지도 마땅한 직업이 없어 스티븐의 뒷바라지를 못 해줬다.
학교엔 못 갔지만 시장에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낡은 영어사전을 하나 샀고 틈틈이 외우면서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외국인과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만큼 영어가 된다. 스티븐의 다음 목표는 ‘운전면허 따기’. 교습 학원을 다니고 시험을 보려면 30만 탄자니아 실링이 훌쩍 넘는 돈이 든다. 아직 3분의 1도 못 모았지만 운전면허증을 따서 ‘사파리 운전기사’가 되는 게 꿈이다. 이제 유일한 가족인 할아버지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스티븐, 대견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인다.
글·사진 정소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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