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회장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승부사다. ‘여자 정주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그의 거침 없는 사업가적 면모 때문일 것이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92년부터 24년간 사업에 뛰어들어 10여 차례에 이르는 M&A로 회사를 키워냈다.
화장품 회사에서 IT 업체까지 변주의 폭도 넓고 깊다. 2004년 카드대란의 여파로 흔들리던 바이오스마트를 인수해 업계 1위로 성장시켰고, 2009년에는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옴니시스템을 사들였다. 또한 같은 해 화장품 제조사인 한생화장품을 인수했고, 2013년에는 라미화장품을 인수해 글로벌 회사로 육성하고 있다.
이처럼 죽어가던 회사들이 박 회장을 만나 ‘알짜’ 회사로 거듭나는 과정도 놀랍거니와, 전혀 다른 색깔의 이 업체들이 서로 협력해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또 한 번 감탄을 자아낸다. 이들 기업의 연 매출은 2000억 원을 상회해 웬만한 중견그룹 부럽지 않다. 2015년에는 한국벤처창업학회에서 ‘혁신기업가대상’을 수상했다.
직원처럼 일하는 대표 “성과보다 직원을 먼저 생각”
박 회장은 긍정의 아이콘이다.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보면 눈물도 없는 냉정한 승부사일 것 같지만,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웃으면서’ 중단을 결정하는 배포를 지녔다.
“결과가 좋을 때는 직원들을 칭찬해주고 결과가 나빠도 신경쓰지 않아요. 추진 과정에서 직원들이 상처 받을 것 같으면 프로젝트를 중단해요. 다음 기회는 항상 있잖아요.”
박 회장은 대표이지만 직원처럼 일한다. 사내에서 아이디어 공모를 자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직원들과 똑같이 의견을 내고 평가를 받는다. 직원들의 열정을 끌어내고 독려하는 것이 CEO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특허가 쏟아지는 비결이다.
끊임없는 M&A로 회사를 키워 왔는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나름의 7대3 법칙이 있어요. 100원 주고 사서 70원을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행합니다. 그 대신 리스크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손해가 나도 ‘내일 되면 200원 벌겠지’ 하며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투자 후 90원이 될 때까지는 지켜봅니다. 하지만 80원이 되면 ‘빨간불’로 인식하고 준비하죠. 80원일 때 회수 구도를 짜야 70원일 때 회수할 수 있으니까요.”
각기 다른 분야의 회사들을 공략해 왔는데, M&A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품입니다. 제품이 좋은 회사는 언제든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기업들을 많이 봤습니다. 과거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로슈라는 회사가 100년의 먹거리를 다 확보했잖아요. 사실 한국인이 개발해서 판 것인데 안타깝습니다. 조그맣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릴 여유가 없고, 제대로 파는 방법을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기다릴 수 있는 힘은 어떻게 길러야 하나요?
“기다릴 수 있는 힘은 창업 때부터 중시될 요소입니다. 최소 1년은 버틸 힘을 가지고 창업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신사업부서의 경우 망해도 되는 돈을 항상 준비해 둡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후일을 기약할 수 있고,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마트를 인수해 업계 1위로 키워낸 것이 놀라운데요.
“10여 년 전에도 카드가 없어지면 어떡할까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드가 없어지면 아프리카나 홍콩에 갈 때 현금을 찾아서 갈까요? 삼성페이, 애플페이처럼 웬만한 국가보다 더 자본력이 강한 회사들이 서로 통합할까요? 저는 걱정하는 대신 새로운 사업을 준비했어요. 플라스틱 표면에 고해상도 이미지를 인쇄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죠. 두꺼운 플라스틱 겉면에 통째로 인쇄하는 것인데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라미화장품의 ‘쌀팩’으로 불리는 마스크팩도 매우 독창적이더군요.
“국수를 먹다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에 공장이 있는데 거기서 쌀국수를 만들거든요. 일반 마스크팩의 경우 15분 이상 얼굴에 붙이면 방부제가 흡수되는데, 쌀로 만들면 먹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거죠. 문제는 쌀을 어떻게 얇게 자르는가인데, 카드 공장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했습니다. 이럴 땐 공장이 많은 게 참 다행이에요.”
혁신을 거듭하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동네만 보는 사람이랑 국가를 보는 사람이랑 다르듯, 시장도 아이템도 크게 보는 것이 중요하죠. 본래 ‘아는 사람과 비즈니스 하면 안 된다’고 해요. 작은 기업들은 시장을 자꾸 한국으로 좁혀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탈피하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동종 업계의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에 너무 감사해요. 그 기업들 덕분에 중국 등 해외에서 라미화장품도 더 대접받으니까요. 국내에서의 경쟁자로만 보지 말고 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혁신을 지휘하는 CEO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요즘 정보는 미디어에서 다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정보를 잘 듣고 화두를 던질 뿐입니다. 가령 오늘 아침 회의에서는 2020년 전에 도입된다는 기후변화협약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러면 구체적인 안건은 각 부서에서 냅니다. 신사업부서는 이러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서 매출이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보상 체계가 확실하다고 하던데요
“우리 회사에는 열정적인 직원들이 많습니다. 확실한 보상 체계가 있어서 일하는 만큼 받으니까요. 만일 아이디어를 내서 1%의 공정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으면 그 개발에 대한 인센티브를 지급해요. 카드 회사의 경우 신제품 아이디어를 내면 도서상품권을 주고 그 아이디어가 매출 증대로 연결되면 매출의 일정액을 주죠. 그게 몇십억 원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항상 본인하고 경쟁하는 분위기입니다.”
중소기업은 인재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나요.
“스펙 좋은 인재보다 직원들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둬요. 연구소장은 중학교만 졸업하셨는데 30년 넘게 근무하셨어요. 우리 회사의 가장 큰 경쟁력 중 하나는 제본 기술과 프린팅 기술인데 어려운 작업도 그분한테 가면 다 완성돼요. 경험에서 익힌 거죠. 세일즈도 대기업에서 일하는 명문대 출신을 뽑으면 엄청 잘 할 것 같지만 결국 일은 사람의 열정이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직원을 뽑을 때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를 중시하죠. 적응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열정이 있어야죠. 요즘 지원자들은 이력서를 다들 잘 쓰는데 본인 업무에 맞는 역량을 강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비서의 경우 특기사항에 ‘정리정돈 잘함’이라고 쓰면 무조건 뽑을 거예요. 자기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회사는 인성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직원들을 뽑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회사로 발돋움한 회사들이 많은데 비결이 궁금합니다.
“옴니시스템을 예로 들어볼까요. 가장 굵직한 거래처가 한국전력인데, 한전에 납품하는 회사들 중에 과연 글로벌 회사가 얼마나 될까요. 국내에서만 제품이 통용되고 외국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번 만큼 재투자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옴니시스템은 비록 마이너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CEO가 집무실에 앉아서 다른 층에 근무하는 직원의 통신량을 알 수 있는 기술도 개발했죠. 계속해서 변해야 합니다.”
성공이 거듭되면, 자칫 중심을 잡기 어려울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회사 임원들이 고마워요. 저를 자제시켜주거든요. 어떤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유혹이 와요. 펀딩을 받으면 어떨까 고민도 하고요. 하지만 그로 인해 기존 회사들이 타격 받으면 직원들에게 죄 짓는 거죠. 우리 규모에 맞춰 가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징검다리’를 열 번은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칫 탐욕과 오만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경고를 달라’고 주위에 부탁해 뒀습니다.”
10년 뒤 어떤 모습의 박혜린이 되고 싶은가요.
“지금까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온 것도 제가 생각한 대로 온 것은 아닙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입니다. 약속도 거의 오늘 약속밖에 안 해요. 사훈도 ‘우리는 즐겁게 일하고 나와 회사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부터 현재를 충실하고 즐겁게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현정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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