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일, 78년의 역사를 지닌 삼성물산에 대변화가 일어났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합병 과정은 험난했다. 합병 전 삼성물산의 3대 주주인 미국계 헤지 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합병 비율을 문제 삼아 반대에 나선 것이다. 결국 삼성그룹은 엘리엇과의 치열한 우호 지분 확보 싸움 끝에 새로운 삼성물산을 만들어 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자신이 최대 주주로 있는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의 합병으로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고 통합 삼성물산은 명실공히 삼성그룹 지배 구조의 정점에 올라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은 0.35 대 1이었지만 통합 회사의 사명은 반대로 ‘삼성물산’으로 정해졌다.
‘삼성’이라는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와 삼성그룹의 창업 정신을 계승한다는 상징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삼성물산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1938년 창업한 삼성상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6년 삼성물산은 창사 이후 최대 격변기를 맞고 있다. 합병 이후 5개월이 지났지만 조직 개편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치훈 사장, 이사회 의장 맡아
작년 말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누가 통합 삼성물산을 이끌게 될 것이냐가 최대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옛 제일모직과 옛 삼성물산이 합병해 탄생한 통합 삼성물산은 대표이사 사장만 4명을 둔 거대 회사였다.
이재용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삼성물산 리조트건설부문 경영전략담당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 등 오너 일가 지분이 30%에 달하는 데다 사실상의 그룹 지주회사라는 점에서 그룹 내 중요성이 삼성전자에 못지않았다.
통합 삼성물산은 합병 이후 윤주화 패션부문 사장, 김봉영 리조트·건설부문 사장, 최치훈 건설부문 사장, 김신 상사부문 사장 등 4명이 각자 대표이사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인사를 앞두고 최치훈 사장의 부회장 승진설, 4명 대표이사 절반 축소설 등이 돌았지만 결국 윤주화 사장만 삼성사회공헌위원회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현재의 삼성물산은 최치훈 사장에게 힘이 집중되는 모습이다. 최 사장은 통합 당시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삼성물산 사장단 가운데 나이와 근무 경력이 가장 많은 윤주화 사장이 떠나면서 최 사장의 존재가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최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강조하는 ‘글로벌 경영 마인드’와 ‘합리적 실용주의’ 코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최고경영자(CEO)로 꼽힌다. 1957년생인 최 사장은 아버지인 최경록 교통부 전 장관을 따라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자란 유학파다. 초등학교는 멕시코, 중학교는 영국, 고교와 대학은 미국에서 마쳤다.
1988년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한 그는 1995년 비(非)엔지니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GE 항공기엔진부문 아시아 사장을 맡았다. GE에서 약 18년 근무한 그는 2008년 삼성전자 사장(프린팅사업부장)과 삼성SDI·삼성카드 사장을 거쳐 2014년 삼성물산 사장(건설부문장)으로 옮겼다.
반면 윤주화 사장이 맡던 패션부문장 자리는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사장)이 맡게 됐다. 삼성물산의 대표이사가 4명에서 3명으로 줄고 오너가인 이 사장이 패션사업을 책임지게 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이 사장이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사장 자리를 내놓고 패션에만 집중하기로 한 만큼 전체 경영에 신경을 써야 하는 대표이사 자리 대신 패션부문장만 맡았다는 해석이지만 앞으로 추가 조직 개편이 단행될 경우 이 사장이 대표 이사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연말 인사서 임원 23% 퇴임
삼성물산의 작년 말 인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가 더 있다. 우선 건설부문은 대규모 임원진 정리와 함께 해외 경험이 많은 인재들이 전진 배치됐다는 점이다. 2015년 실적이 다소 부진했던 건설부문은 사장급 2명과 전무 7명을 포함해 총 30명의 임원이 퇴임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전체 임원이 132명이란 것을 감안하면 23%에 달하는 규모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지난해 3분기까지 해외 공사 차질로 3000억원에 가까운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이 때문인지 해외 실무 경험이 많은 임원들이 전진 배치됐다.
오세철·존창 등 2명이 부사장에 올랐고 강수돈·조성래·최영우 등 3명이 전무로 승진했다. 강성원·김교준·김상국·김용희·김정욱·노세흥·손용호·신혁·엄성용·이경수·이영경·최석웅·허양중·정기현·사이먼 리퍼 등 15명은 상무로 승진했다.
오세철 부사장은 1962년 부산 영도 출생으로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삼성물산 건설부문에서 말레이시아 KLCC 현장과 싱가포르 근무에 이어 아부다비 ADIA 현장소장, 두바이 EXHIBITION 현장소장(상무), 중동지원팀장, 일반빌딩2팀장을 거쳐 삼성물산 글로벌조달실장(전무)과 플랜트PM본부 본부장을 역임했다. 여성 임원 12명…신·구 연령대 조화
존창 부사장은 29년간 GE에너지·케나메탈(Kennametal) 등 글로벌 기업에서 아시아 지역 마케팅, 비즈니스 전략을 담당한 전문가다. 1961년생으로 1984년 미국 샌호세주립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UC 버클리대 기계공학 석사를 받았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인사에는 이서현 사장을 중심으로 한 브랜드 강화와 중국 시장 장악이라는 밑그림이 엿보인다. 이번 인사에서 박철규 삼성물산 패션부문 상품본부장이 패션부문 부사장으로, 박남영 상하이법인 상품담당 부장이 상무로 승진해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옛 제일모직에서 가장 성공한 브랜드인 빈폴과 최근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는 에잇세컨즈 브랜드를 만들어 낸 조용남 빈폴1 사업부장과 정창근 에잇세컨즈 공급운영팀장도 각각 상무로 승진 임명됐다.
박 신임 부사장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삼성물산 패션부문 상품본부장, 해외상품·여성복사업부장 등을 거쳤다. 앞으로 박 부사장은 이서현 사장을 도와 패션부문 모든 브랜드를 총괄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이번 인사에서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물산 패션부문 상하이법인 상품담당, 기획팀장 등을 거친 박남영 신임 상무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빈폴1 사업부장, 빈폴 맨·레이디스·키즈 팀장을 역임하며 대표 브랜드인 빈폴 성장에 기여했던 조용남 신임 상무,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빈폴 맨·키즈·골프 팀장, 에잇세컨즈 공급운영팀장을 맡았던 정찬근 신임 상무 등이 눈에 띈다.
삼성물산을 움직이고 있는 전체 임원 232명(작년 9월 말 기준)을 학력·나이·성비별로 각각 분류해 분석해 본 결과 삼성물산이 원하는 인재상과 로드맵이 대략 엿보였다. 우선 삼성물산에는 다른 기업에 비해 유독 유학파(39명)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삼성그룹 내 다른 계열사 임원은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비해 삼성물산은 유학파 출신 임원이 39명으로 서울대(40명)와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재용 부회장이 강조하는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와 해외 영업 강화가 화두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어 한양대(19명), 고려대(16명), 연세대(11명), 성균관대·서강대·중앙대(각 10명)순이었다.
임원들의 연령대는 다른 계열사에 비해 고른 편이다. 삼성전자는 1960년대 출생(47~56세)이 전체 임원의 82.7%를 차지하는 것에 비해 삼성물산은 전체 임원의 77.2%인 179명이 이 연령대다. 반면 1950년대 출생 임원 비율이 19.3%로 45명에 이른다. 이는 현장에 대한 관리와 영업의 노하우 등이 필요한 업종의 특성상 신·구의 조화가 필요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삼성물산은 여성 임원의 비율도 5.2%(12명)로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건설부문은 여성 임원이 1명에 불과하지만 패션부문에서 활동하는 여성 임원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오너가 이부진·이서현 사장 활약 ‘주목’
한편 삼성물산 중심의 지배 구조 재편과 함께 이재용 부회장의 두 동생인 이부진·이서현 사장의 역할에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삼성물산에 대한 오너가의 지분율을 총 30.8%다. 이 중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3.3%, 이재용 부회장이 16.5%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현재 통합 삼성물산의 공식 직함이 없다. 반면 삼성물산 지분 5.5%씩을 보유하고 있는 이부진·이서현 사장은 삼성물산 내 사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 사장과 함께 삼성물산 리조트건설부문 경영전략담당 사장, 상사부문 고문의 직함을 갖고 있다.
1970년생인 이부진 사장은 경기초등학교와 대원외고 불어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아동학과에 89학번으로 입학했다. 오빠인 이 부회장과 동생인 이서현 사장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것과 달리 해외 유학 생활 경험이 없다.
이 사장의 사내 인맥은 삼성물산 상사 부문 출신들이 주를 이룬다는 분석이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초기에 제일모직 이상으로 중요한 인재 풀을 갖고 있던 곳이다. 이부진 사장은 1995년 삼성복지재단 기획지원팀으로 입사해 2001년 호텔신라 부장을 맡았다.
동생인 이서현 사장은 삼성물산 패션부문을 진두지휘하며 삼성물산의 경영일선에 참여하고 있다. 1973년생인 이서현 사장은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삼성에 입사한 이후 출산과 경영을 병행하며 지금의 자리에 올라왔다. 언니인 이부진 사장과는 대외 활동 방식이 다르다.
이부진 사장이 학연·지연 등을 잘 챙기지 않는 것과 달리 이서현 사장은 각종 모임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기초교와 서울예술고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3대 패션학교로 불리는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특히 작년 말 인사에서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사장 자리를 내놓고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집중하고 있다. 향후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독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서현 사장의 남편은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다. 김 사장은 고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차남이다. 이재용 부회장과는 청운중 동문이라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부회장이 동생 이서현 사장을 김 사장에게 소개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1968년생인 김 사장은 1991년 미국 웨슬리안대에서 국제정치학과를 졸업했고 1993년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2000년 스탠퍼드대에서 MBA를 취득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 경영컨설팅 업체인 모니터컴퍼니에서 일했고 2000년 결혼해 1년간 인터넷 상거래 업체 이베이에서 근무하면서 국제 경영 감각을 키우다 2002년 제일기획 상무보로 삼성에 입성했다.
차완용 기자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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