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전주곡이 더 달콤하다
준비하면서 느끼는 설렘이 더 소중…여행길에 진정한 자신을 만나라

헤르만 헤세는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여행의 진짜 즐거움은 지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데 있다.

그러니 여행의 맛은 떠나기 전부터 지금 겪고 있는 속박에 대해서조차 너그러워질 수 있는 여유에서 시작된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에서 읽은 글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선생이 음악회 표를 얻었는데 부득이 가지 못할 사정이 생겼단다. 그래서 아는 일본 여인에게 표를 선물했더니 그녀가 살짝 실망한 눈치더란다.

주는 사람이 서운하게 느껴질 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고 그런 서운함이 싹 가시더란다. “선생님, 음악회에서 직접 음악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음악회 가기 전에 미리 그 곡을 들으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또한 결코 시들한 게 아니거든요.” 아마 그런 내용으로 말했던 것 같다.

설렘. 그게 바로 여행이 주는, 막상 여행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달콤한 선물이다. 막상 여행지에 가면 고생도 해야 하고 뜻하지 않은 일로 힘들기도 하지만 떠나기 전 설렘은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항상 여행은 그 전주곡이 달콤하다. 한가한 삶을 누리는 이에게는 여행의 전주곡이 그리 절절하지 않다. 그 설렘은 열심히 혹은 바쁘게 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다. 그런데도 그걸 누리지 못하고 그저 후다닥 떠나는 여행은 전주곡이 생략된 채 주제만 연주하는 곡처럼 흐름이 끊어진다.

재작년에 보름 동안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나섰다. 그런데 그 여행은 그런 달콤한 설렘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사실 여행을 떠날 처지가 아니었다. 아주 바쁠 때였다.

그만큼의 시간을 짜내기 위해 미리 해야 할 일들을 갈무리하고 다녀온 뒤 처리해야 할 일들을 준비해 둬야 하는 상황이어서 떠나기 전날 저녁까지 내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틈나는 대로 가까스로 짐을 꾸리기에 급급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던 히말라야

그래도 곧 떠난다는 즐거움은 여전히 유효했다. 몸은 힘들고 심리적 부담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며칠 있으면 설산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그것을 떨쳐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꼭 어디 먼 곳으로 가야만 여행일까. 며칠 혹은 긴 시간을 지금의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여행일까. 도회의 바쁜 일상에서도 저녁의 산책이 여행이고 작업실에서 글 쓰다가 불쑥 자리 털고 나와 산길을 오르고 읍성의 성곽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여행이다.

아나톨 프랑스가 그랬던가.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라고. 집에서, 사무실에서, 작업실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가 가벼운 산책길에서 풀리고 뜻하지 않은 영감이 떠올라 서둘러 메모해 두는 즐거움 또한 이미 여행이다.

현대인의 삶은 매일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고 분초를 다투는 촉박함에 쫓기며 어쩌다 주어진 휴식조차 전투적으로 해치우기 일쑤여서 박복하다. 도회에서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서울에 있다가 해미에 내려오기만 해도 시간의 흐름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지금 내 삶이 어디에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해야 하는 적을 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서울에서는 늘 시간에 쫓기고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해미의 작업실 수연재에 앉아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오직 창밖 산과 들에 비추는 태양의 각도와 양과 빛깔로 가늠하면 충분해 아예 시계를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다. 배고프면 먹고 일에 부하가 걸리면 책장에서 시집 한 권 꺼내 잠시 시 한 편 읊조리면 된다.

여행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거부하는 것

재작년 그렇게 갑자기 히말라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순전히 가야산 때문이었다. 작업실인 수연재 창밖으로 당당하지만 한가롭게 펼쳐진 가야산 자락에 하얀 눈이 소담하게 덮은 날이었다.

며칠 뒤 햇살이 나면 다시 그 눈이 녹기에 실제로 눈 덮인 산을, 그나마도 정상에만 상대적으로 오래 머무르는 눈 산을 보는 것은 의외로 짧았다.

1년 내내 머리와 허리에 눈을 이고 진 설산을 보고 싶었다. 거의 모든 사람의 위시리스트에 들어 있을 히말라야 트레킹. 영화 ‘버킷 리스트’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아이템이던 그것이 떠올랐다.

그래 가자! 그렇게 저지른 일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한 달에 두 번씩 산에 오를 때마다 이전에는 틈틈이 쉬는 걸 즐겼지만 히말라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로는 그 빈도를 줄였고 해미에서는 부지런히 읍성에서 개심사에 이르는 산길을 올랐다. 사람이 묘한 게, 히말라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산에 오르는 게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히말라야 트레킹의 어느 한 코스를 상상해 보고 다리는 가파른 계단이나 험한 바윗길도 끄떡없을 힘을 비축해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목적이 아무리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해도 어떤 한 지점으로 목표를 정해 오직 그 방향으로만 접근한다는 게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킨다.

물론 그런 제목의 책을 쓴 릭 워렌은 매우 검소하게 살며 낡은 트럭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새들백교회는 어떤 종교 의식이나 신학적 논쟁이 아닌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 주고 삶의 질적인 면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라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어쨌거나 난 ‘목적이 이끄는’ 그런 삶은 ‘노생큐’다. 그저 그런 표현이 싫다. 그뿐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계획도 많고 바람도 많다. 희망의 부피만큼 불안도 크다. 어쩌면 그런 시간이기에 우리에게 짧은 여행이라도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새해 벽두부터 한가롭게 여행 타령이냐고 타박하지 마시라. 일만 하며 사는 것 아니다. 놀기만 하며 사는 것 아니다. 자기 리듬을 자신이 주인이 되어 끌어가야 한다.

그러니 새해 그런 습관도 길러보자. 반복의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을 만나고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 풍경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여행이 아닐까. 주말 하루라도 그런 일탈을 저지르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