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까지 잘 해 왔으니 그 연장선상에서 산업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더 높이자는 목표를 내세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의 주력 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더욱이 그 위기의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럽다.
실리콘밸리에서 엿본 ‘개방형’ 패러다임
연초 실리콘밸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이 나가야 할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신산업 방면에서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 등의 대기업들이 자신들이 그동안 축적한 지식과 노하우 등을 후배 창업 기업들에 개방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유가 ‘개방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다못해 어느 회사를 방문해도 회의실에 등록하기만 하면 누구와도 비즈니스를 논의하는 회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져 있는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였다. 대부분이 창업할 때 아버지의 차고에서 실험하고 논의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이들 대기업들이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몽땅 개방하는 자세는 놀라웠다. 이른바 플랫폼 경제라는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 구현되고 있었다.
굳이 이해관계로 해석해 본다면 후배 창업 기업들이 자신들이 제공한 플랫폼을 활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연다면 결국 자신들이 제공한 플랫폼의 활용도가 더 높아질 것이고 그만큼 대기업 자신들의 사업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리콘밸리의 개방된 산업 생태계를 본 후 한국 산업 발전의 특성과 대비해 봤다. 한국 주력 산업의 발전 방식은 모두가 알다시피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이었다.
이런 방식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성을 가져 왔고 다른 국가들보다 기술개발에 좀 더 힘을 기울인 몇몇 제품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 방식의 기술에 익숙한 우리 기업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 핵심적인 부품·소재 협력 기업들과 함께 진출하는 사례가 대부분인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대기업들은 이질적인 다른 기업들과 협업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더욱이 자신들과 경쟁하는 업체와의 협업은 당연히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삼성의 휴대전화에 LG의 디스플레이가 이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바다 저편의 애플은 라이벌 기업들인 삼성과 LG의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을 부품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애플은 주력 제품인 스마트폰의 제조 공정을 아예 대만 기업인 폭스콘에 맡기고 있고 폭스콘은 그 생산 과정을 중국에서 구현하고 있다.
어쩌면 애플은 계속 새롭게 태어나는 실리콘밸리의 창업 기업들과 제휴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혈해 새로운 서비스를 장착한 새로운 스마트폰을 계속 내놓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흐름은 수평적 협업 방식
바야흐로 세계의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한국식 수직적 통합 방식의 효율성과 미국식 수평적 협업 방식의 효율성이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빠르게 쌓아 온 제조 기술력이 주무기인 한국 기업들로서는 이렇게 쌓은 기술력을 남에게 쉽사리 개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한국이 추격자일 때 일본 기업들이 기술 유출을 걱정했듯이 한국 기업들도 추격해 오는 중국 기업들에 기술이 유출될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수직적 통합 방식은 모든 새로운 부가가치를 내부에서 이뤄내야 하고 심지어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모두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효율적인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열심히 뛰고 있는 내부의 인력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다른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기술 개발을 맡은 연구자들도 주어진 과업 혹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정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에 착안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전혀 새로운 산업은 한국의 수직적 통합 체계에서는 태어나기 힘들다는 반성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 들어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기업들과 창업 기업들이 함께 힘을 합쳐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내는 장으로서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전국적으로 18곳이나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바라보면 그 설립 목적이 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혁신센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협업만으로는 창조경제가 바라는 궁극적 산업 생태계의 형성이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축적한 것을 모두 개방하지 않는 한 말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모든 힘을 쏟아 개발한 첨단기술 자체를 개방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마도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비즈니스의 경험 특히 글로벌 비즈니스의 경험, 네트워크 등은 충분히 개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또 다른 큰 문제는 주력 산업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한국의 수직적 통합 방식의 제조 기술 개발 면에서 턱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는 중국 산업이 다른 한편으로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한 플랫폼 경제를 제대로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알리바바와 샤오미가 상징하는 중국의 산업 생태계는 이미 개방형 산업 생태계를 구현해 내고 있다.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로서의 플랫폼경제, 이것을 실현해 내는 일은 누가 주도해야 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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