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잎 먹는 누에는 변화와 창조 상징…정약용 “뽕나무는 옷의 근본”
‘뽕나무집 아들’ 유비의 야망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던 송파구 잠실 일대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초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종합운동장과 거대한 놀이공원이 자리한 잠실은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누에는 뽕나무 잎을 먹고 사는데 잠실(蠶室)이라는 지역명도 누에농사를 짓는 곳이란 뜻이 아닌가.

잠실제도는 중국에서 유래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의 지시로 ‘잠실’을 둬 그곳에 울타리를 치고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게 가시울타리를 치고 민간 여인네 중에서 깨끗한 이를 선발해 누에농사를 짓게 했다.

잠실은 출입이 제한돼 있어 유배지로도 사용됐던 모양이다. 사마천도 잠실에 구금돼 ‘사기(史記)’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사기’는 ‘잠서(蠶書)’라고도 불린다.

맹자도 왕도정치를 하기 위한 경제적인 토대 중의 하나로 뽕나무를 심고 누에농사를 할 것을 권했다.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전해졌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농사는 식물(食物)의 근본이고 뽕나무는 옷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뽕나무를 심게 하는 것이 수령의 주요한 임무가 된다.”

조선시대 임금들이 친히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나 왕후가 누에농사 짓는 모범을 보이는 친잠(親蠶)의 의례를 행한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황제의 파라솔 닮은 뽕나무

‘삼국지’에서 뽕나무의 주인공은 단연 유비 현덕이다. 유비의 고향은 탁군 탁현이다. 지금의 허베이성 줘저우시다. 탁현의 누상촌(樓桑村)이 유비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누상촌은 누각처럼 큰 뽕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누상촌의 유비가 살던 집 울타리 옆에는 아주 커다란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뽕나무는 키도 우뚝하고 모양도 특이해 멀리서 바라보면 황제가 밖으로 행차할 때 수레에 사용하던 대형 파라솔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이 집안에서 필히 귀한 인물이 나올 것이야!”

어린 유비도 나무 아래서 장난을 치며 뛰어놀다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도 언젠가는 이 뽕나무처럼 큰 덮개를 가진 수레를 타고 말거야!”

그러나 이 말은 ‘장차 내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유비의 숙부 유우경이 깜짝 놀라 화를 냈다.
“유비야!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자칫하면 우리 가문이 멸족될 수도 있는 위험한 말이다.”

어쨌거나 훗날 유비는 촉한의 소열제로 즉위해 황제가 타는 대형 파라솔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탔으니 자신의 꿈을 이룬 셈이다.

유비의 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본 그의 숙부가 학비를 보태주며 유비를 당대 최고의 학자인 노식에게 보냈다. 노식 선생의 문하에는 요서에서 온 공손찬이라는 젊은이도 있었다. 유비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공손찬을 형으로 깍듯이 모시며 공경했다.

공손찬도 과묵하지만 겸손하고 의리가 있는 유비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훗날 반동탁연합군이 돼 다시 만나게 된다. 북평태수가 된 공손찬이 군사 1만5000명을 이끌고 덕주 평원현을 지날 때였다.

멀리 뽕나무 숲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말 탄 장수 몇 명이 달려 나왔다. 공손찬이 자세히 보니 앞장선 사람은 유비 현덕이었다.
“아니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옛날 제가 형님 덕분에 이곳 평원현의 현령이 되어 줄곧 머물러 왔습니다. 형님께서 평원현을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진작부터 저기 뽕나무 숲속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봉추라는 별명을 가진 방통을 유비에게 처음 소개해 준 사람은 수경선생 사마휘였다. 유비가 사마휘를 만나러 갔을 때도 뽕나무가 등장한다. 사마휘의 시동이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저희 사부님께서 나무에 올라가 뽕나무 잎을 따고 계셨는데 방통 어른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날 두 분은 뽕나무 아래 앉아 차를 마시며 해가 저물 때까지 종일토록 담소를 즐기셨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너희 사부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안내해 다오!”

시동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과연 수경선생이 뽕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유비 역시 뽕나무 아래서 수경선생과 천하대세를 논하며 좋은 인재도 추천받는 등 많은 자문을 구했다.

중국 비단, 로마 귀족을 홀리다

각설하고, 유비가 살았던 탁현 누상촌은 그 이름처럼 마을에 뽕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다만 뽕나무를 닮은 황제의 파라솔 운운하는 이야기는 나관중을 비롯한 후대 호사가들의 각색이라고 본다. 나관중처럼 촉한에 경도돼 유비를 신화화하고 숭배하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뽕나무는 황제나 제후가 국가 운영의 토대로 삼을 만큼 재배를 장려하는 상서로운 나무였던 만큼 자신들이 추종하는 영웅 유비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뽕나무가 나오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중국인들은 뽕나무를 좋아한다.

뽕나무를 먹고사는 누에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뽕나무 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토해낸 명주실이 아름다운 비단을 만들어 내고 그 비단은 멀리 로마제국 귀족 아녀자들의 혼을 쏙 빼어 놓을 정도였다.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졌던 실크로드가 동서양의 물품 교역 차원을 떠나 양대 문명이 서로 교통하는 글로벌 소통의 상징적인 루트였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누에가 먹은 모든 뽕나무 이파리들이 드디어 변화를 일으켜 비단실이 되면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 벌레 전체가 비단실로, 육체 전체가 영혼으로 변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의무나 감미로운 고민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명주실을 토해내고 그것이 환상적인 비단으로 만들어지듯이 뽕나무와 누에는 심리학적으로 ‘창조적 변환’의 상징이다.

사마천이 잠실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불세출의 역사서를 만들어냈듯이 우리 지구촌도 상전벽해의 창조적 변화가 이뤄져 개인도 좋고 사회도 좋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상생이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