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모두 '협력'이 중요…어려울 땐 도움 청해야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방해 요소를 국가별로 수치화한 것이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지난해 3월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유리천장지수는 100점 만점에 25.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위민인이노베이션(Women in Innovation, 이하 WIN)은 140여 명이 소속된 국내 최대 현직 여성 임원 모임이다. 차세대 여성 리더를 키우는 한편 성공 리더의 지속적 성장을 돕는다.

한 기업의 핵심이자 한 가정의 핵심이기도 한 WIN 소속 임원을 만나 성공 스토리를 들어봤다.

악한 보스도 보스다…순응도 전략
여성 임원 "내가 가면 길이 된다" 포기보다 도전 선택
허금주 교보생명 상무(법인본부장)의 일과는 운동으로 시작된다.

체력 관리를 위해 3년 전부터 피트니스센터에서 근력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새벽 운동 뒤에는 그날의 일정에 맞는 스타일로 패션을 완성하고 일터로 향한다. 출근길엔 라디오를 통해 밤사이 뉴스를 확인한다.

회사 도착과 동시에 수백 통의 e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한다. 마케팅 담당자들과의 회의를 시작으로 주요 고객사와의 업무 회의, 대응 전략 수립을 위한 본사 관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등 쉴 틈 없이 업무가 이어진다.

허 상무는 평소 제한된 시간에 수많은 업무를 정확히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분·초 단위까지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업무 외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WIN을 비롯해 미국상공회의소 전문직여성위원회, 이화여대 이화리더십개발원, CWIK(Career Women in Korea), 서울장학재단 등 여성 인력의 경력 및 리더십 개발을 위한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며 ‘허금주가 가면 길이 된다’고 얘기해요. 25년간 교보생명에 근무하면서 항상 ‘최초’라는 단어가 따라다녔기 때문이죠. 사원 출신 첫 임원 승진 여성, 금녀의 영역인 비서실장 경험, 중국 주재원 등의 직무를 거쳐 국내 금융회사에서 유일한 여성 B2B 담당 법인본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평소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해 왔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개발되면 가장 먼저 도전했어요.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성과는 자연스레 따라오더라고요.”

허 상무는 일·가정 양립을 위해선 주변 자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15년간 급여의 상당 부분을 시부모와 가사도우미에게 투자했다.

현재 대학생 및 고3 수험생인 두 아들을 가장 오랜 시간 케어해 준 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이면서 직장에서의 성공까지 이뤄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영화 ‘광해’의 제작자이자 미국 폭스 픽처스 프로덕션 대표를 지내고 있는 남편도 그의 직장 생활을 묵묵히 지지해 준 후원자 가운데 하나다.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몇 번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순응했고 더욱 악착같이 노력했다.

“조직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그만한 위치에 있는 상사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상사가 불편하고 힘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죠. 상사가 인정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 후배들과 고민을 상담할 때 자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악보스도 보스다’고 말하곤 하는데요. 현재 38명인 교보생명 임원 중 여성 임원은 단 2명이에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롱런 위해선 강약 조절 필요
여성 임원 "내가 가면 길이 된다" 포기보다 도전 선택
김미진 HP코리아 상무(서비스 솔루션 그룹장)는 기업 고객을 응대하거나 HP 파트너를 통해 고객사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HP 기업분할 프로젝트를 지휘하기도 했다. WIN에서 비상임 등기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처음부터 임원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김 상무는 1997년부터 6년여간 싱가포르(HP아시아퍼시픽)에서 근무했다. 그때의 과감한 결정은 향후 그의 커리어에 많은 도움이 됐다.

“싱가포르로 떠날 때가 결혼 전이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어요. 당시만 해도 미혼 여성이 외국에 나가 혼자 근무하는 게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해당 업무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고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에 해외 근무를 결심하게 됐어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기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도전하고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다 보면 기회가 왔을 때 수용력이 빨라지고 타이밍도 잘 잡을 수 있습니다.”

김 상무는 임원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로 책임감을 꼽았다. 어떤 업무에 앞서 보상이나 결과 등을 기대하기보다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맞춰 처리하기 위한 책임감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만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직장 생활 중 어려운 순간은 끊임없이 발생하기 마련이죠. 매너리즘에 빠져 스스로 동기를 잃어버리거나 방향성을 상실했을 때가 가장 큰 슬럼프였던 것 같아요. 외부에서 주는 동기부여나 격려만으로는 계속해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많기 때문에 자생력도 갖출 필요가 있어요.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너무 힘들 때면 ‘이 정도면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곤 합니다. 롱런하는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약 조절이 필요합니다.”

경쟁력·협업 마인드 갖춰야
여성 임원 "내가 가면 길이 된다" 포기보다 도전 선택
노원 KPMG삼정회계법인 상무는 기업 감사 시즌인 이맘때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낸다.

저녁 10시 이후 퇴근이 거의 일반적이고 주말에도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 최근 감사본부로 이동한 뒤부터는 업무량이 더욱 늘었다. 주 3~4회 정도의 고객 미팅은 물론 지방·해외 출장까지 소화해야 한다.

노 상무는 여성으로서 성공하기 힘든 한국의 사회적 환경이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법인만 봐도 입사 초반 여성의 비율이 30% 정도로 적은 편이에요. 10년 정도 지나면 그 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지죠. 140명의 임원 가운데 여성 임원은 8명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슬럼프도 있어요. 본부 이동으로 업무가 바뀌거나 승진 후 또 다른 요구 사항이 주어졌을 때 난관을 겪는 일이 많아요. 남자 선배와 달리 여자 선배들은 앞서나가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각각의 직급에서 어떻게 성과를 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지침서가 없는 셈이죠. 제가 여성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비록 직장은 다르지만 다양한 분야의 선배들을 만나 일하는 얘기나 경험담 등을 듣는 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노 상무가 임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특유의 성실함이다. 그는 입사 후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해 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2007년 법인 최대 프로젝트인 국제회계기준(IFRS)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성과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임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노 상무는 여성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갖춰야 할 사항으로 ‘나만의 경쟁력’과 ‘협업 마인드’를 꼽았다.

“업무 능력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경쟁력과 브랜드가 반드시 필요해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나 숫자상으로 여성의 승진이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죠.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가정과 일을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어요. 남편·부모님·육아도우미 등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성해 둬야 합니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예요.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동료·후배·선배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이에게 기회도 따른다
여성 임원 "내가 가면 길이 된다" 포기보다 도전 선택
박형재 한국코카콜라 상무(홍보부)는 홍보·마케팅 전문가다.

쌍용제지·P&G·두루넷 등에서 10여 년간 기업 홍보 업무를 담당하다가 2002년 마케팅부 차장으로 한국코카콜라에 합류했다. 박 상무는 입사 후 마케팅부 부장·이사를 거쳐 2006년 만 35세의 나이에 홍보부 상무로 임명됐다. 사내 최연소 임원 승진 케이스다.

그는 주니어 시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했던 업무 경험을 통한 실무 능력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민해 가며 보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임원이 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달려와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모든 일을 하면서 ‘내가 하면 좀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야 해’라거나 ‘나니까 이 정도는 해야 돼’라는 식의 욕심이 있었죠. 사원부터 주임, 대리 때까지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매순간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죠. 코카콜라 입사 후부터는 운도 따르더라고요. 부서가 분리되면서 새로운 부서장 자리가 생겼고요. 인사이동으로 임원 자리가 공석이 된 경우도 있었어요. 회사는 그때마다 저를 택했고 저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고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임원 승진 후 맡게 된 프로젝트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주위의 기대치는 물론 더욱 잘해 내고 말겠다는 스스로의 욕심까지 더해지면서 고민이 쌓여 갔다. 그는 일단 경험해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시행착오 끝에 임원으로서의 역할과 향후 방향 등을 잡아낼 수 있었다.

“저는 후배들에게 목표가 득이 될 수 있지만 때론 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해요. 직장 생활에서 처음부터 어떠한 목표를 설정해 버리면 달성한 뒤 오는 허탈감이 조금 더 일찍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죠. 달성하지 못했을 때 필요 이상의 패배감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부분일 테고요. 직장 생활은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 부분, 조직이 받쳐 줘야 하는 부분 등 자기 의지만 가지고는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 마련이죠. 따라서 자신만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끝까지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준비된 이에게 운도 따르는 법이죠.”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choi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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