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선 향후 신사업 진출을 위한 자금 마련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한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재용 부회장 시대의 삼성인 만큼 비주력 계열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매각에 나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일기획은 지난 2월 17일 지분 매각설과 관련한 한국거래소 조회 공시 요구에 대해 “주요 주주가 글로벌 에이전시들과 다각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화된 바가 없다”고 공시했다. 다각적인 협력 방안으로는 삼성이 글로벌 에이전시와 공동으로 제일기획을 경영하거나 아니면 경영권 전부를 넘기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글로벌 에이전시들 중 가장 유력하게 떠오른 곳은 프랑스 광고 회사인 퍼블리시스(Publicis)다. 지난 1월 13일 블룸버그통신은 퍼블리시스가 아시아 진출을 위해 제일기획 지분 30% 매수를 추진 중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퍼블리시스, 아시아 진출을 위한 포석
WPP·옴니콤에 이어 글로벌 광고 회사 순위 3위인 퍼블리시스는 레오버넷·사치앤드사치 등 다국적 광고 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고 삼성전자의 북미 지역 매체 광고 구매 대행을 맡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에서 기존 광고주였던 프록터앤드갬블(P&G)과 로레알을 경쟁사에 빼앗긴 적이 있어 이번 인수를 통해 아시아에서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제일기획으로선 퍼블리시스와 협력하면 삼성전자의 해외 광고를 보다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을 전망이다.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이 취약한 북미 광고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회재 대신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해외 TV 광고 중 일정 부분을 바로 퍼블리시스의 자회사인 스타콤이 담당한다”며 “퍼블리시스의 제일기획 지분 인수 추진은 삼성전자의 해외 매체 대행을 지속하고 나아가 물량을 더 늘리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매체 광고 구매 대행은 다량의 TV 광고 시간을 미리 싸게 사 광고주가 원할 때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라며 “제일기획은 삼성전자 외에는 해외 광고주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해외 매체 대행은 거의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제일기획 지분은 지난해 9월 공시 기준으로 삼성물산 12.64%, 삼성전자 12.60%, 삼성카드 3.04%, 삼성생명 0.16% 등 삼성 계열사가 총 28.44%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밖에 제일기획 자사주 11.96%, 국민연금 10.25%, 매튜스 6.07%, 한국투자신탁운용 5.22%, 소액주주가 38.06%를 갖고 있다.
제일기획의 주가는 매각 관련 소문이 불거진 2월 17일 전일 대비 11.08%(2200원) 폭락했다가 이튿날 1.70%(300원) 오른 1만795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2월 18일 종가 기준으로 시가총액을 계산하면 2조649억원에 이른다. 삼성그룹이 보유 지분 전량을 판다고 가정했을 때 삼성그룹은 5873억원 정도를 손에 쥐게 되는 셈이다.
지분을 일부 매각한다면 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향후 지주회사로 떠오를 삼성물산이 나설 가능성이 높다. 삼성물산은 자회사 지분 30% 확보 등 지주회사가 되기 위한 요건을 채우기 위해 추가 자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매각 대금이 삼성그룹의 신사업에 쓰일 것으로 관측하는 의견도 있지만 금융 투자 업계에선 5000억~6000억원대 자금으로 신사업 진출까지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 투자 업계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인수·합병(M&A)을 진정성 있게 진행하는 것이라면 비주력 계열사들을 정리하는 게 일단 가장 크다”며 “매각 금액 자체가 1조원이 채 안 돼 그 돈으로 M&A에 적극 나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시점에선 다소 무리”라고 말했다.
한편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은 지난 2월 17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매각설과 관련해 “(외신 등을 통해) 계속 나왔던 얘기”라며 “확인된 바 없다”고 짧게 답했다. 삼성그룹 관계자 역시 “현재로서는 제일기획이 공시한 내용이 전부”라며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내용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1973년에 창립된 제일기획은 현재 해외 41개국 52개 거점을 보유한 국내 1위이자 글로벌 15위 광고 회사다. 지난해 매출 총이익(9487억원) 중 해외 비율이 72%를 차지했다. 임직원 수는 6100여 명으로 이 중 해외 인력이 4700여 명, 국내가 1300여 명이다.
1988년 국내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제일기획은 2011년과 2013년에 칸광고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국내 광고 업계를 선도해 왔다. ‘업계 1위’ 제일기획…그룹선 ‘비주력’
이처럼 국내 광고 업계에선 독보적인 1위에 자리해 있지만 그룹 차원에서 비주력 사업이다. 이재용 시대의 삼성은 기존의 핵심 사업 부문인 전자와 금융에 집중하는 한편 제약·바이오·의료기기 등 신사업에 적극 투자할 방침이다.
2014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M&A 행보에 가속도가 붙었다. 삼성물산·제일모직·에버랜드를 합병하고 바이오 사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5대 신수종 사업을 발표한 2010년 이후 삼성전자가 인수한 기업 중 확인된 곳은 모두 15곳으로 이 중 메디슨·뉴로로지카 등 의료 기기 업체 M&A에 1조 원을 투입한 것이 가장 큰 규모였다.
이 부회장은 현재 ‘인수’보다 ‘매각’에 더 집중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일례로 2013년 하반기부터 전자와 금융 위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화학·방산 사업 등을 정리했다. 화학과 방산 계열사를 한화에 2조원대에 매각했고 나머지 화학 계열사를 롯데에 3조원대에 팔아 치웠다.
구체적으로 보면 2014년 11월 방위산업을 담당하는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를, 석유화학 부문의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을 잇달아 매각했다. 2015년에는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삼성SDI 케미컬사업을 차례로 내다팔았다. 또한 삼성의 적극 부인에도 불구하고 보안 사업인 에스원과 삼성물산 주택사업 등의 매각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이번 매각 추진은 그동안 재계에 알려져 온 삼성 3세들 간의 예상 후계 구도를 흔드는 판국이다. 전자와 금융은 이재용 부회장, 호텔과 유통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패션과 광고는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이 맡게 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화학 분야에 이어 광고 사업 부문마저 소유 구조가 바뀌게 되면 향후 남매간 계열 분리를 위한 정리 작업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henr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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