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밀어붙이기’ 더 이상 안 통해…창의력은 유연성에서 나온다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불가능한 일은 끝내 해내는 집요한 노력과 끈기를 일컬을 때 우리는 흔히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인용한다. 우공이산에 얽힌 고사는 원래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이야기로, 열자(列子)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중국 태행산과 왕옥산에 아흔 살 노인이 살았다. 노인은 이 두 산 때문에 바깥출입이 불편하자 아들들과 함께 그 산들을 깎아 너른 길을 내기로 했다. 다른 식구들은 찬성했지만 부인은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다.

부인의 반대는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돌아가는 길이 불편하다고 산을 깎는단 말인가. 하지만 고집 센 노인은 세 아들과 손자까지 데리고 산을 깎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태행산과 왕옥산을 다 깎아 너른 길을 낼 것이라는 신념으로….
산을 옮긴 우공은 몰랐던 ‘수평적 사고’
수직적 사고의 한계

굳은 신념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과하면 탈이 난다. 산을 깎는 일을 자기가 다 못하면 손자의 손자에까지 이르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을 덧붙여 그 신념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첨가하는 건 애교라고 해두자.

조용하던 산에 난리가 났다. 깜짝 놀란 산신령이 옥황상제에게 어떤 노인이 산을 깎고 있다고 이르자 옥황상제는 노인의 끈기에 감동해 역신(力神)인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멀리 옮겨 놓았다는 얘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대표적 사례로 이보다 더 화끈하고 감동적인 것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고두고 이 사례를 신념의 힘으로 든다. 이 노인이 바로 ‘우공(愚公)’이고 ‘우공이산’은 아무리 크고 힘든 일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꼭 이뤄진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고사성어로 쓰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노인이야말로 정말 이름처럼 ‘어리석은 노인’이라고 생각한다(‘우공’을 ‘어리석은 노인’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우씨 노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하면 된다.” 이 말처럼 우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표어가 또 있을까. 한국인의 불굴의 추진력은 정말 높이 사도 모자랄 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한 우물만 파라”도 있다.

이런 말들은 어쩌면 우공이산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무슨 일이든 이뤄진다는 강한 신념은 분명 가치 있는 일다. 하지만 안 되면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많은 게 인생이다.

땅 밑에 물길이 없는데 아무리 깊이 판들 물이 치솟을 수 있을까. 애당초 그곳에 물이 있을지 면밀하게 조사하고 나서 우물을 파야 할 일이다. 그러고도 파도파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곳은 그만두고 다른 곳에 다시 구멍을 뚫어봐야 한다. 나오지도 않을 우물을 백 번 파 봐야 그저 땅 파는 수고 말고는 없다.

하나의 목적이나 목표를 정해 계속해 파고드는 것은 수직적 사고방식이다. 예전에는 이처럼 무조건 밀어붙이는 방식이 어느 정도 통했다. 그건 다른 실질적 대안이 없을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올인’하면 뭔가는 이뤄졌다. 그것도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달려들어 온 힘을 기울이면 꿈이라고 여겨졌던 것도 마침내 이뤄 내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1960년대부터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산업화니 뭐니 하는 게 그런 소산이었다.

물론 군사 문화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드러난 것이긴 하지만 분명 이뤄 낸 게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저히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마침내 성취해 냈을 때의 그 감격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목표를 이뤄 내기 위해 치른 값은 생각보다 훨씬 큰 게 많다. 이뤄 낸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니 성공의 이면에 있는 희생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교조적인 가르침이 삶을 망친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그 노력을 다른 곳에 쏟았다면 훨씬 더 많고 큰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미련함일 수도 있다. 정말 해결해야 하고 총력을 기울이면 할 수도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이 큰 가치가 있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그렇게 ‘돌격 앞으로’ 하면서 끌고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작은 신념이 성과를 얻으면 점차 그것은 하나의 교조로 자리 잡기 쉽다. 교조주의는 무조건적이고 일방통행적인 수직 위계적 사고를 만든다. 그런 식의 사고는 필요하지도, 또 해서도 안 되는 세상이 됐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금까지 팠던 공이 아까워 그대로 밀고 나가는 미련스러움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어떤 상황인가. 경우의 수들이 즐비한 시대다. 하나에만 집착해 다른 변화에 무심할 때 얻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인식적 측면에서 수평적 사고는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고정관념이나 과거의 지배적 사고만 고집하지 않고 새롭고 다양한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력 전문가인 에드워드 드 보노는 창의력은 ‘수평적 사고(lateral thinking)’에 의해 증가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수학을 배울 때 더하기를 먼저 배우고 곱하기를 나중에 배운다. 더하기를 아무리 배워도 곱하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수학적 확장은 불가능하다. 수직적 사고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기존의 유형에 맞춰 가게 할 뿐이다.

새로운 가정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게 바로 수평적 사고다. 수직적 사고로는 현대가 요구하는 창의력의 발휘가 불가능하거나 심각하게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아니라 “안 되는 건 과감히 포기하라”, “막히면 돌아가라”는 것도 수용해야 한다. 그게 수평적 사고방식이다. 길이 막히면 지금까지 온 길이 아까워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막힌 길 앞에서 그냥 말라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우물만 파라”는 격언도 이젠 바꿔야 할 때가 됐다.

“파보다 나오지 않으면 얼른 다른 우물을 파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우물은 있다.”

그리고 우공이산의 신념도 중요하지만 그 어리석음도 동시에 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사고가 필요하다. 우공이산은 비합리적이고 수직적 사고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합리적 판단력을 가진 부인이 반대했는데도 끝까지 우겨 말도 되지 않는 고집을 부린 우공. 감동적이게도 기적적으로 옥황상제의 도움을 받아 뜻을 이뤘다는 것은 그 일이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과만 본다. 어쩌다 기적적으로 이뤄진 결과만 보면서…. 교조주의에 입각한 수직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다,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