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불운에 웅크린 59세 노인…우정과 친애는 인간의 본능}
‘까칠남’ 오베 씨, 이웃에게서 구원 찾다
[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하네스 홀름 감독의 ‘오베라는 남자’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스웨덴 영화다.

59세의 남자 오베(롤프 라스가르드 분)는 상처투성이 노인이다. 그는 어려서 엄마를 잃었다. 사춘기에는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고아가 된 오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정든 오두막집이 불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신혼 초에는 부인 소냐(이다 엥볼 분)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가 버스가 전복됐다. 소냐는 하반신을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잃었다. 몇 년 전에는 오베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 줬던 소냐마저 병들어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했던 직장마저 잃고 완전히 삶의 의욕을 상실한 오베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의 자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불청객 이웃들이 그의 죽음을 방해한다. 그렇지 않아도 까칠한 성격에 원칙주의자인 오베에게 귀찮게 접근해 오는 이웃들 때문에 오베는 정말로 ‘죽지 못해’ 산다.

소냐가 죽고 나서 스스로 외톨이가 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과도 교류를 단절한 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오베를 ‘살려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웃 사람들이다.

오베는 어린 시절부터 소중한 것을 잃고 생긴 수많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됐다. 상처는 받을수록 아프다. 내성이 생기지도 않는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라도 지면 보기는 흉해도 아픔은 덜어진다. 하지만 채 아물지 않은 상처 딱지를 건드리면 처음 상처 받을 때보다 더 아픈 법이다. 트라우마, 즉 심리적 상처도 마찬가지다.

오베가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던 것은 아니다. 오베는 아버지가 일하던 기차에서 발견한 승객의 지갑을 신고할 줄도 알고 불타는 집에 들어가 사람을 구해내기도 했던 의리의 사내였다.

하지만 거듭 사고를 당하고 소중한 집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과정에서 생긴 생채기들이 오베를 한구석으로 몰았다. 결정타는 따뜻한 어머니이자 어여쁜 누이이며 존경하는 여신이기도 했던 사랑하는 부인 소냐의 죽음이었다.

그런 오베에게 새로 이사 온 이란 출신 이방인 여인 파르바네(바하르 파르스 분)의 가족들은 ‘까칠남’ 오베의 요지부동한 마음을 서서히 흔들어 놓는다.

◆ 원시시대 초원, 동맹이 생존에 유리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7개의 부분 자아 중 ‘친애(affiliation)’ 부분 자아라는 게 있다.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온갖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사바나 초원에서 굶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사귀고 동맹을 맺어야 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위험했다. 그들은 팀을 이뤄 사냥과 채집을 했고 식량을 공유하고 주변의 약탈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이웃들과 무리를 지어 협력하며 스스로를 지켜냈을 것이다.

친애 부분 자아는 우정을 암시하는 뭔가에 의해 발동되고 우정이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 활성화된다고 한다. 오베는 자신의 도움에 고맙다는 표시로 파르바네가 사프란 향료를 넣은 페르시안 치킨 요리를 선물해 주자 처음에는 당혹해한다.

나중에 오베는 파르바네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다. 사다리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다친 파르바네의 남편 패트릭을 위해 문병도 가고 그들의 어린 두 딸도 돌봐준다. 소냐와 같이 가던 빵집에서 맛있는 빵을 사서 같이 나눠 먹기도 한다.

상처 속에 둘러싸여 꽁꽁 얼어붙어 있던 오베의 친애 부분 자아가 자극을 받아 활성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을 비롯한 유무형의 자원과 기술의 공유는 동맹과 협력의 기본이다.

사소한 다툼 끝에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린 오베의 오랜 친구 루네. 노환으로 전신 마비가 된 루네가 복지담당 공무원의 농간으로 원하지도 않는 요양병원에 강제로 입원돼 부인 아니타와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오베가 나섰다.

친애 부분 자아가 극도로 활성화한 오베의 적극성이 이웃 사람들의 동맹과 협력을 이끌어 냈다. 집도 없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거리를 헤매던 길고양이 어니스트, 동성애자라는 것을 고백했다가 부모 집에서 쫓겨난 미르사드 등을 돕고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거둬들일 정도로 오베의 변화는 놀라웠다.

따뜻한 봄볕에 엄동설한의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오베의 얼어붙은 마음은 그렇게 녹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