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시대 개막

올해 VR 기기 출시 봇물…미중은 정부 차원서 집중 투자

확장성·플랫폼 선점 노린 'IT 거인들' 격전장
[한경비즈니스=김태헌 기자] 최근 가상현실(VR)은 인공지능, 빅 데이터 등과 함께 미래를 바꿀 새로운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VR는 말 그대로 정보기술(IT)을 활용해 현실과 비슷한 ‘가짜’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4D 영화와 놀이기구 등을 통해 이를 경험한 바 있다. VR는 최근 등장한 기술이 아니다. 그동안 잊혔던 VR가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오큘러스가 일으킨 VR ‘열풍’

삼성전자·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 등 대부분의 글로벌 IT 기업들이 미래 핵심 성장 동력원 중 하나로 VR를 꼽는다. 한국 정부도 VR 육성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오래된 기술’인 VR에 왜 전 세계가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물론 최근 출시된 VR 제품들은 이전과 달리 기술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오큘러스의 ‘오큘러스 리프트’나 HTC의 ‘바이브’, 삼성전자의 ‘기어VR’ 등은 모두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의 화질과 성능이 기존 제품에 비해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이 VR에 주목하는 진짜 이유는 기술적 측면보다 확장 가능성과 플랫폼 선점 때문이다. 이미 VR는 여러 산업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또 IT 산업에서 플랫폼 선점은 그 분야의 성패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 지 오래다.

미국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VR와 증강현실(AR)의 시장 규모는 2016년 22억 달러에서 2025년 8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VR가 차세대 플랫폼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생활·작업·소통방식 모두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VR의 돌풍은 올해가 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단연 VR였다.

당시 삼성전자는 ‘갤럭시 7’ 언팩 행사를 통해 5000여 명의 관람객에게 기어VR를 경험하게 했다. 삼성전자 기어VR를 착용하고 갤럭시 S7 출시 영상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VR 열풍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물론 삼성전자가 대규모 행사로 VR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긴 했지만 VR 산업의 트렌드를 이끄는 기업은 오큘러스다. 오큘러스는 지난 4월 오큘러스 리프트를 출시했고 삼성전자와 협업해 기어VR를 탄생시켰다.

오큘러스 창업자 파머 러키는 2011년 자신의 어머니 집 창고에서 VR 게임용 HMD를 개발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은 글로벌 게임 업체 이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존 카맥에 의해 발굴돼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게임 전시회 E3에서 대중에 공개됐다.

이후 오큘러스는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인 킥스타터를 통해 초기 자금을 확보하며 기술력을 키웠다. 오큘러스는 DK1, DK2를 거쳐 올해 초 소비자용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출시했다. 또 앞서 2014년 페이스북에 인수돼 자본력과 기술력까지 갖췄다.

오큘러스를 인수한 저커버그 CEO는 오큘러스 리프트를 게임 기기가 아닌 다방면에서 활용 가능한 범용 VR 기기로 받아들였다. 페이스북은 오큘러스 인수 후 360도 영상과 사진을 지원하며 VR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경쟁사인 구글 역시 VR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구글은 VR가 콘텐츠 유통과 소비의 새로운 방식이라는 전제로 유튜브와 스트리트뷰에 360도 VR 콘텐츠를 유통하고 있다. 구글은 골판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용 HMD ‘카드보드’를 제작할 수 있는 도면을 공개하고 완제품 판매에도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홀로렌즈·홀로스튜디오·홀로그래픽 등 홀로 시리즈를 개발해 윈도와의 결합을 꾀하고 있다. 애플은 이미 2000년대 중반 사내에 팀을 구성해 VR 기기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특허를 취득했다.

또 2013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키넥트 3D 센서 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기업 프라임센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연평균 28.4% 급성장 전망

VR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와 의료 목적은 물론 문화·관광·영화·게임 등 여가 생활과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 기술이 접목된다.

이미 미국 유니버설스튜디오와 디즈니랜드 등은 VR 테마파크 구축에 나섰고 에버랜드 역시 롤러코스터를 즐길 수 있는 ‘기어VR 어드벤처’를 선보였다. 롯데월드도 VR 롤러코스터를 오는 8월 중 도입할 예정이다.

또 오큘러스 리프트를 시작으로 게임에 특화된 VR 기기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게임과 VR를 연계하면 더욱 실감나고 재미있는 게임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유통 플랫폼 강자인 소니 역시 VR 게임 개발에 직접 뛰어들었다. 소니는 모피어스로 불리는 VR 게임용 HMD를 개발했고 이를 적용해 플레이스테이션 VR를 올 10월 출시할 예정이다.

또 슈팅 게임 개발 업체인 밸브 코퍼레이션은 ‘스팀VR’ 플랫폼을 출시하고 게임사와 협력해 VR 게임 유통에 적극 진출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스코넷엔터테인먼트는 오큘러스 기반의 VR 전용 슈팅 게임 ‘모탈 블리츠’를 출시했다.

게임 개발사 CCP 등도 VR 게임 개발에 속도를 붙였고 닌텐도 역시 2016년 2월 VR를 지원하는 하드웨어에 대한 기술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게임 업체 반다이남코도 VR 오락실에서 6개의 게임에 대한 서비스 계획을 세웠다.

제로 레이턴시(Zero Latency)는 오큘러스 기반의 VR 게임방을 세계 최초로 2015년 8월 호주 멜버른에 문을 열기도 했다.

또 전시 등에서도 VR는 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파리 웹 박물관, 영국 소호 박물관, 미국 햄슨 가상 박물관 등에서도 VR를 기반으로 박물관을 운영한다.

국내에서는 SK텔레콤·KT가 VR 체험관을 열었고 제주 항공우주박물관도 VR를 전시에 활용하고 있다. 의료와 관련해서도 삼성전자는 독일·러시아 등에서 VR를 활용해 심리 치료를 진행 중이며 분당 서울대병원은 VR 치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아우디·람보르기니 등은 신차 모델의 홍보 수단으로 VR를 활용하고 있고 현대차도 랠리 영상을 기반으로 한 4D 시뮬레이터와 자율 주행차 체험 등 VR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또 콴타스항공도 1등석 이용자들을 위해 A380 기내에 기어VR를 제공한다.

현재까지 나온 VR 기기는 시각적 요소만을 반영한 기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더 진짜 같은 VR를 누리기 위해서는 오감을 자극하는 기기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영화관에서 바람이 나온다가거나 의자가 움직이고 화면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방식이다.

이런 기술 개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영국 테슬라 스튜디오가 선보인 VR 슈트인 ‘테슬라슈트’는 VR 게임을 위해 개발됐다. 전신에 52개의 촉감 전달 장치를 달아 전기 자극을 주고 보다 현실적인 VR 게임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독일 포츠담대 연구팀도 암밴드 타입의 ‘임팩토’라는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팔에 붙이면 VR 콘텐츠와 연동돼 암밴드로 전기 자극을 줘 적에게 타격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4D 영화관처럼 바람·진동·분무 등 오감을 자극하는 제품도 있다. ‘필리얼 VR’ 마스크는 얼굴 안면부에 착용하면 바람·진동·분무·향기 등의 효과를 준다. 카트리지 종류는 고무 타는 냄새와 꽃·바다·불꽃·화약 냄새 등이다.

이 밖에 피트니스와 VR의 결합도 주목받는다. 게임용 헬스 자전거 버줌은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 바이브를 지원한다. VR 헤드셋에 이를 연결하면 실제 자전거를 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 센서 4개를 내장해 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페달 속도를 더해 운동 효과를 측정하기도 한다.

이카로스라는 운동기구는 가상현실 헤드셋을 쓴 채 사람이 올라타면 비행하듯이 엎드려 가상현실과 운동을 접목해 즐길 수 있다. 이 제품을 이용하면 우주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글로벌 VR 기기 출하량은 2016년에서 2025년까지 5년간 1400만 대에서 3800만 대로 연간 28.4%씩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VR 기기는 PC나 게임 기기와 연결해 사용하는 프리미엄 제품과 스마트폰 연동형 제품이 출시됐다. 프리미엄 제품은 보다 높은 몰입도가 필요한 게임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반면 스마트폰 연동 제품은 풍경 등 빠른 전개가 필요하지 않은 콘텐츠 이용에 주로 사용된다.
확장성·플랫폼 선점 노린 'IT 거인들' 격전장
◆메모리·디스플레이 업체도 수혜

VR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에서 구글·페이스북 등이 VR 영상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VR 카메라의 보급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현재 출시된 VR 카메라는 대부분이 2K 이상의 고화질을 지원하고 있다. 보다 전문적인 영상 촬영은 4K 이상의 화질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작은 스마트폰 크기의 화면을 이용한다면 사람이 이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VR 기술은 미디어 콘텐츠 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360도 카메라는 VR 콘텐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제품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물론 리코세타·지롭틱 등도 보급형 360도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다. 또 레드디지털시네마 등 6K 이상 고화질 카메라를 출시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VR 기기의 보급이 증가하면서 관련 산업도 혜택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NH투자증권 홍성배 연구원은 ‘2016년 주목해야 할 테마 사물인터넷 : VR 기기의 보급과 콘텐츠의 확대’ 보고서를 통해 “VR 기기의 수요와 함께 D램과 낸드 탑재량 증가, 고화질 디스플레이 적용 등 스마트폰 하드웨어 개선과 함께 관련된 기업들의 수혜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VR 콘텐츠의 성장은 게임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산업 리서치 기관 디지캐피털은 2020년 VR 콘텐츠 시장의 절반 이상을 VR 게임이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VR와 관련된 하드웨어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지만 VR의 핵심인 콘텐츠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이미 콘텐츠의 중요성은 3D TV의 실패와 아이폰의 앱스토어 성공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국내 VR 관련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다. 하드웨어인 기기 가격이 여전히 비싸고 이용할 만한 킬러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용자 확대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올해와 내년 총 6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VR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로 했다.

먼저 정부는 대규모 수요 창출 전략과 연구·개발, 콘텐츠 제작을 유도하고 민간 중심의 가상현실 신시장 창출과 확산을 돕는다는 계획이다. 또 올해는 VR 게임, VR 테마파크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내년에는 건축·교육·의료 등으로 이를 확대할 예정이다.

또한 정부는 게임·영화·방송·테마파크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스포츠·관광 분야에 VR를 적용한 콘텐츠 지원 제작도 계획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VR 산업의 원년으로 불리는 올해 기획재정부·미래창조과학부·문화체육관광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가 합심해 VR 산업 육성과 생태계 조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중국은 공업신식화부가 VR 산업 발전 로드맵을 제정하고 독자적 기술 개발 표준안을 마련하기 위한 ‘VR 산업 발전 백서 5.0’을 지난 4월 발표했다.

미국은 2000년대 중반 ‘혼합현실(MR : Mixed Reality)’이란 명칭으로 10대 미래 핵심 전략 기술로 지정, 공공(교통·국방·의학 등) 분야에 적용해 투자 중이다. 유럽 역시 VR로 구현된 가상 투어를 통해 유럽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아키오가이드(Archeoguide)’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kt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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