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깃한 콘텐츠 비즈니스 이야기④]
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디바이스의 전쟁…2020년 700억 달러로 성장 예상
현실로 들어온 VR의 세계
(사진)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9월 개막된 IFA 2016에서 관람객들이 삼성전자 기어 VR을 체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경비즈니스=길덕 이노션 미디어컨텐츠팀장 ] 2015년 1월 어느 날,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회사 곳곳을 어슬렁거렸다. 종합 광고 회사 이노션은 방송이나 디지털 광고에서부터 공간 마케팅이나 스포츠 마케팅까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종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다.

가장 기대가 되는 넥스트솔루션본부에 도착했다. 넥스트솔루션본부는 기존 TV 광고 중심의 캠페인을 넘어서는 새로운 캠페인 방안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조직이다. 디지털 중심의 광고성 캠페인을 실행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기반의 마케팅 시사점을 도출하고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마케팅 콘텐츠를 만드는 일들도 한다.

넥스트솔루션본부의 한 회의실이 소란스러웠다. 탄성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회의실을 엿보는 것은 실례지만 궁금증이 폭발해 조심스럽게 유리벽을 통해 그 안을 봤다. 책상과 의자들은 한쪽으로 미뤄져 있고 한 명이 검정색 스키 고글 같은 것을 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허공에 있는 뭔가를 만지는 것 같았다.

◆ 디지털 마케팅의 중심에 선 ‘VR’

넥스트솔루션본부장 김종필 이사와 눈이 마주치자 들어오라고 했다. 김 본부장은 “VR HMD(Virtual Reality Head Mounted Display : 가상현실 콘텐츠를 이용하기 위해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기기)를 착용하고 VR 콘텐츠를 체험하는 중이에요. 광고주들에게 VR 콘텐츠를 활용한 마케팅 방안을 제안하려고 검토 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 HMD의 앞부분에 스마트폰을 장착해 특수 렌즈로 보면 마치 어떤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과 똑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직 어지럼증과 같은 기술적인 한계는 있지만 이 VR 콘텐츠를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와 연결해 뭔가 새로운 것을 준비 중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같은 해, 반소매 차림으로 다녀도 금방 땀이 나기 시작할 즈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김 본부장이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VR 콘텐츠와 시뮬레이터 연동을 마쳐 내일 최종 테스트를 할 예정이에요. 같이 갈래요?”

오래돼 보이는 작은 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로 갔다. 구석 외진 곳에 있는 천장이 매우 높은 건물로 들어갔다. 칸막이가 없어 창고 같이 시원하게 펼쳐진 건물 제일 안쪽에 자동차 모습을 하고 있는 커다란 시뮬레이터가 있었다.

외관은 경주용 자동차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 1인용 차량 의자가 있었다. 그 밑은 4개의 축으로 지탱됐다. 멍하니 시뮬레이터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하고 있는데 김 본부장이 VR HMD를 건넸다.

“이걸 쓰고 한 번 타보세요. 현대자동차가 출전 중인 자동차 경주대회 ‘월드랠리챔피언십(WRC)’ 코스를 경험할 수 있어요.”

시뮬레이터 조정석에 앉은 후 경주 차량용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안경을 벗고 HMD를 썼다. HMD 상단에 있는 버튼을 돌려가며 초점을 맞췄다. 안경 없이도 화면이 또렷이 보였다. 누군가 안전벨트와 HMD 착용을 점검한 후 안내했다.

“값싼 카드보드 HMD나 중국 저가 HMD에는 초점을 맞추는 기능이 없어요.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면 오른손을 들어주세요. 바로 멈출게요.”

기계가 미세하게 떨렸다. 시동이 걸린 것이다. 왼쪽으로 돌렸더니 드라이버가 있었다. 출발과 함께 몸이 뒤로 쏠렸다. 비포장도로의 덜덜거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매우 빠른 속도감이 심장박동을 급하게 상승시켰다. 차량이 오른쪽으로 회전하자 몸이 왼쪽으로 밀렸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실제 차를 타고 가는 느낌과 똑같았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봤다. 차의 움직임에 따라 창 밖 나무나 울타리 등이 멀어지고 가까워졌다. 앞을 바라봤다. 좀 넓은 공간이 나왔다. 경주용 차의 브레이크가 밟히고 왼쪽으로 돌자 뒷바퀴가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차창 밖에 붉은 흙먼지가 일어났다.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다행히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지도 않았다.

경주용 차량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스릴이 넘쳤다. 하지만 진짜 차에 탄다면 무서울 것 같았다. 작은 실수로도 경기장 밖으로 튀어나가거나 구르거나 나무를 들이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 본부장은 “무엇이든 (간접)경험할 수 있는 VR은 마케팅 콘텐츠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로 들어온 VR의 세계
◆ 성인 콘텐츠, VR 활성화 역할

VR 시장 역시 일반적인 미디어 시장과 같은 구조다. 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디바이스(기기)로 연결되는 생태계로 구성된다. 지금까지는 디바이스와 플랫폼 사업자들이 시장을 이끌고 그 뒤를 콘텐츠 사업자들이 따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정 유진투자증권 기업분석팀장은 “디바이스는 VR 서비스 활성화를 위한 단순한 역할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며 플랫폼 사업자가 VR 산업의 헤게모니를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VR 디바이스는 콘텐츠를 구현하는 연산장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스마트폰 기반, PC 기반, 게임 기기 기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VR 기기는 삼성전자의 기어VR, PC 기반은 오큘러스리프트, 게임 기기 기반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4와 연동되는 플레이스테이션VR(프로젝트명 모피어스) 등이 대표적이다.

VR 플랫폼 사업은 구글과 페이스북이 적극적이다. 이들은 디바이스 사업을 함께 추진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동영상 플랫폼, 애플리케이션 장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의 서비스 영역을 VR까지 확대하고 있다. 2014년 3월 오큘러스를 23억 달러에 인수한 페이스북은 2015년 9월 360도 VR 서비스를 시작했다.

페이스북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360도로 촬영된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오큘러스 개발자 대회인 ‘오큘러스 커넥트’를 개최해 그간 개발해 온 VR 기술을 공개했다. 가상현실 속에서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장소 이동도 자유롭다.

또 가상현실 공간 내에서 지인과 영상통화도 가능하며 3D로 구현된 아바타들이 한 방에서 최대 8명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VR을 소셜 서비스로 활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구글은 2014년 5월 ‘구글 개발자 회의’에서 스마트폰 사용자가 저렴한 가격에 가상현실을 쉽게 체험하도록 종이로 만들 수 있는 ‘카드보드 HMD’를 공개했다. 2015년 ‘구글 개발자 회의’에서는 ‘카드보드 HMD2’와 함께 ‘유튜브 360도 서비스’를 공개했다.

유튜브틀 통해서도 360도로 촬영된 영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 2016년 ‘개발자 회의’에서는 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7.1 ‘누가(Nougat)’에 VR 플랫폼 ‘데이드림’을 탑재한다고 밝혔다.

지난 11월에는 구글의 VR HMD ‘데이드림뷰’를 79달러에 선보였다. 섬유 소재로 만든 ‘데이드림뷰’는 스마트폰 연동형이며 기존의 HMD보다 작고 부드럽고 가벼워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구글은 애플리케이션 유통 마켓인 구글 플레이에서 VR 전용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2015년 1월부터 VR 플랫폼 ‘밀크VR’을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VR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이 팀장은 “구글은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모바일 운영 시스템 ‘안드로이드’와 애플리케이션 장터 구글 플레이를 활용해 디바이스 제조사와 콘텐츠 제작사들이 협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며 “스마트폰 시장의 역학 관계처럼 구글이 구축해 놓은 생태계에서 콘텐츠·네트워크·디바이스 업체들이 서로 공존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고 결국 VR 시장에서도 구글이 승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VR 콘텐츠는 게임·엔터테인먼트·헬스케어·교육·광고·커머스 등 다양하다. 김 본부장은 “아직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비교적 적극적인 마케팅용 콘텐츠나 엔터테인먼트·게임 등 이용자들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되고 있지만 향후 헬스 케어나 스포츠 중계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로 들어온 VR의 세계
◆ 2020년 80조원 시장 열려

산업 초기에는 성인용 VR 콘텐츠가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금융투자회사 파이퍼 재프리(Piper Jaffray)는 성인용 VR 콘텐츠 시장이 2016년 1300만 달러에서 2025년 1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0년 만에 거의 80배 가까운 성장인 것이다.

지난 6월 일본 아키하바라에서는 ‘성인 VR 페스타 01’이 열렸다. 공개된 장소에서 진행됐지만 예상 밖의 인기를 끌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레진코믹스·탑툰 같은 독립 콘텐츠 플랫폼 사업자들이 성인용 콘텐츠로 구매력 있는 사용자들을 확보한 후 콘텐츠 종류를 확대해 성장한 것처럼 VR 콘텐츠 사업자들도 유사한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과거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확산되는데 성인 콘텐츠가 큰 역할을 한 점들을 고려할 때 VR 성인 콘텐츠가 VR 기술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밖에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영화나 게임뿐만 아니라 골프·농구·공연 등의 중계방송과 같은 다양한 콘텐츠들이 VR로 만들어지고 있다. VR롤러코스터와 같은 테마파크형 VR 놀이기구도 계속 선보이고 있다.

광고와 커머스 분야에서도 VR 콘텐츠 활용이 활발하다. VR 콘텐츠 이용 자체가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김 본부장은 “자동차의 시승, 호텔의 객실이나 가구 전시장 방문, 부동산 매물 탐방 등과 같이 고객들의 경험이 필요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발생하는 마케팅 활동 등이 VR 콘텐츠로 대체되거나 보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클럽메드는 VR로 객실과 주변 여행지의 다양한 활동들을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가구 업체 이케아도 VR 쇼룸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헬스 케어나 교육 분야에서도 VR 콘텐츠 활용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VR을 활용하면 현실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운동을 쉽게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개발회사 와이드런은 오큘러스리프트를 착용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VR 자전거를 개발했다.

독일의 디자인 회사 하이브(HYVE)는 ‘이카루스’라는 VR 운동기구를 만들었다. HMD를 쓰고 이 운동기구에 팔과 다리를 올려놓으면 새로운 형식의 운동을 할 수 있다. 의학이나 과학 교육처럼 실제로 관찰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VR을 활용한 교육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팀장은 “VR 콘텐츠 시장 초기에는 VR 시장 활성화를 위해 게임·성인물이 산업 성장의 주요 요인이 될 전망”이라며 “방송·영화·교육 분야에서는 사용자에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치를 제공하면서 새로운 수요를 견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VR 생태계의 많은 참여자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VR 시장 규모도 급속하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시장조사 회사인 트렌드포스(Trendforce)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콘텐츠)를 포함한 2016년 VR 시장 규모를 67억 달러로 예상했고 2020년에는 700억 달러까지 급격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소프트웨어 시장은 2018년부터 급격하게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인수·합병(M&A) 컨설팅 업체인 디지캐피털(Digi-capital)은 2020년 VR 시장 규모를 300억 달러 정도로 예상했다. 어쨌든 수년 후 40조~80조원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