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서경배·이기형·윤영환 회장 ‘눈앞 성과보다 인류 미래 본다’
‘과학 사랑’에 사재 턴 우리 회장님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여기, 과학에 눈먼 ‘회장님’들이 있다.

이들은 기초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곳간 문을 열고 평생 일군 재산을 내놓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과학재단을 설립해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석학들의 강연을 무료로 진행하는 식이다.

과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유통기업 회장부터 평생을 과학과 함께했을 제약 기업 회장까지…. 과학에 눈먼 ‘회장님’들의 전공 분야는 가지각색이다.

이들은 왜 수익성도 없는 기초과학에 투자했을까. 과학 사랑에 빠진 회장님들을 조명했다.
‘과학 사랑’에 사재 턴 우리 회장님
(사진) 김성훈 서울대 교수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카오스재단 강연장에서 4월 5일 ‘단백질’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서범세 기자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 기초과학의 장 열다

“단백질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지난 4월 5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 스퀘어 공연장에 자리한 카오스재단 강연장에서 김성훈 서울대 분자의학바이오제약학과 교수의 ‘단백질 : 3차원의 마술사’ 강연이 열렸다. 김 교수는 2017 봄 카오스 강연인 ‘물질에서 생명으로’ 시리즈의 셋째 연사다.

이날 강연장에는 오전부터 내린 봄비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의 청중이 찾아 자리를 채웠다. 퇴근 후 들른 직장인부터 학교 수업을 마친 중·고등학생까지 강연장을 찾은 이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하나,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서울 A여고에 재학 중인 오 모 양은 “바이러스에 관심이 많아 강연을 신청하게 됐다”며 “내용이 유익해 즐겨 듣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 홍 모(55·여) 씨는 “카오스재단 강연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석학들한테서 그 분야의 가장 핫한 소식을 알 수 있어 좋다”며 “다른 곳에선 이런 질 좋은 강연은 돈을 내고 들어야 하는 것이 많은데 무료여서 부담이 없다”고 치켜세웠다.

강연장 바깥에선 또 다른 과학 예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블루스퀘어 2~3층에 자리한 1160여㎡ 규모의 과학 전문 서점이자 복합 문화 공간인 ‘북 파크’에서는 최신 과학 서적을 열독하거나 세미나실인 ‘뉴턴 룸’, ‘다윈 룸’ 등지에서 과학 서적을 앞에 놓고 토론하는 이들의 모습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서점 곳곳엔 지구본부터 천체망원경까지 다양한 과학 용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그야말로 과학의, 과학을 위한 공간이다.
‘과학 사랑’에 사재 턴 우리 회장님
(사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에 위치한 '북파크'의 세미나실인 뉴턴룸에서 이용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서범세 기자

하지만 강연장 그 어디에도 설립자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강연장을 찾은 이 모(48·여) 씨는 “무료 강연의 재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며 “어찌됐든 기초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카오스재단 강연장은 2014년 11월 26일 재단법인 카오스(KAOS)에 의해 문을 열었다. 재단의 설립자는 국내 첫 인터넷 쇼핑몰인 인터파크를 만든 이기형 인터파크홀딩스 회장이다.

언뜻 과학과 연이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서울대 물리천문학과 졸업 후 못다 이룬 기초과학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사재를 출연했다.

이 회장은 재단 설립 전에도 카오스 지식 콘서트, 과학 대중서 출간 등을 진행했지만 이런 산발적이고 일회적인 시도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재단 출범 당시 이 회장은 “카오스재단을 통해 더욱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기초과학 및 수학의 대중화를 이끌 것”이라며 “과학의 진정한 주체가 돼야 할 대중과의 소통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재단은 수학과 기초과학에 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지식을 대중 강연과 지식 콘서트, 출판 등으로 풀며 대중에게 다가선다. 학생(만 12세 이상)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과학의 특정 주제에 대해 학기당 주 1회 2시간, 10주간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강연의 주제는 물리천문·지구과학·화학·생명공학·수학·인문사회 분야의 석학 9명으로 이뤄진 ‘카오스 과학위원회’에서 선정한다. 지난 3년간 뇌·지구 등 다양한 과학 주제가 다뤄졌다. 올 상반기 주제는 ‘물질에서 생명으로’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생명과학 연구 지원

유통업계에서 기초과학을 사랑한 회장님은 또 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다. 서 회장은 지난해 7월 공익 재단인 ‘서경배과학재단(이사장 서경배)’의 문을 열고 기초과학, 특히 생명과학 연구에 대해 장기적·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서 회장은 3000억원 규모의 개인 보유 주식을 출연했다.

생명과학에 대한 서 회장의 꿈은 선친인 고 서성환 회장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서 회장은 재단 출범 당시 “기술과 과학에 관심이 많은 선친의 영향을 받았다”며 “어릴 때 ‘아톰’이라는 만화를 즐겨 보며 과학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는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일념하에 시작은 3000억원이지만 앞으로 1조원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재원으로 신진 기초 과학자를 육성하고 생명과학의 발전을 도모해 인류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다.

현재 재단은 생명과학 분야의 기초 연구 분야에서 새로운 활동을 개척하고자 하는 신진 과학자 접수 공모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 한국인 신진 연구자 3~5명을 공개 선발하고 각 과제당 5년 기준 최대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이 중 우수 연구자에게는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원도 계획하고 있다.

◆태광그룹·대웅제약 기초과학 투자로 사회 환원

최고경영자(CEO)들의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비단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1990년 태광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임용 회장은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을 위해 자신의 호(號)를 딴 일주학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20억원 이상을 기초과학 등 학술 지원 사업에 투자했다.

순수 학문에 대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 학사와 석·박사, 해외 석·박사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순수·기초학문 육성을 위해 학술 대회나 포럼, 저술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설립 목표다.

실제 재단 설립 후 20여 년간 국내 학사 794명, 석·박사 175명, 해외 석·박사 169명 등 총 1138명이 장학생으로 도움을 받았다. 비용으로 셈하면 300억여원이다. 기초·순수학문 연구자 대상이며 졸업 후 태광그룹에 기여해야 한다는 등의 별도 조건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이 재단은 또 포스텍(POSTECH) 수학연구소와 함께 일주수학학교를 운영하며 젊은 수학자 연구 활동에 연간 2000만원 규모의 지원을 하고 있다.

‘제약사 회장님’도 과학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대웅제약 창업자인 윤영환 명예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모두 출연해 2014년 6월 ‘석천대웅재단’을 설립했다. ‘석천’은 윤 회장의 호다.

이 재단은 대웅제약이 축적해 온 의약 분야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의약 분야 발전을 위한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 한국 생명과학 분야를 선진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과학 사랑’에 사재 턴 우리 회장님
◆“수익성 제로, 기초과학 마중물 위해”

업계에선 이들의 기초과학 투자에 의구심을 던지기도 한다. 투자비용 대비 수익성 등의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재단을 설립한 이들조차 이 문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때문에 사재 출연의 형식으로 재단을 운영한다는 ‘우문현답’을 내놓기도 한다.

서경배 회장은 “과학은 기업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테크놀로지 또는 엔지니어링과 사이언스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회사와 관계가 아예 없다”고 못 박았다. 서 회장은 “(재단 운영을) 과학에 대한 접근으로 봐 달라”며 “5년의 지원은 이론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고 연구의 결과물을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남식 카오스재단 사무국장 또한 “바이오연구소를 세운다든지, 신사업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들은 기업의 성과로 직결될 수 있지만 기초과학은 별개의 문제”라며 “기초과학 투자는 비용만 계속 투입되는, 수익과 관계가 없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사무국장은 “아이들 교육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기초과학 지원 사업은 성과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한계가 있다”며 “기업에서는 보다 실험적인 요소를 통해 창의적인 기초과학 투자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즉 민간이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사회 변화’를 들었다.

김 사무국장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질문 및 토론 중심의 문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점이 여러 개 들어와야 상권이 생기듯이 과학이란 문화 공간도 우리만으로는 문화 운동 확산이 어림없다”며 다른 기업과 민간의 참여를 권고했다.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