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카드 하나로 ‘세금·교육·투표·의료’ 원스톱 처리 가능 (사진) 바이오 정부를 활용한 출입국 관리 시스템. /연합뉴스
[한경비즈니스 칼럼=정동훈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7년 5월 10일 새 정부가 출범했다. ‘급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선거 과정도 이례적으로 짧았고 투표 바로 다음 날 대통령에 임명돼 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을 하게 된 이번 ‘장미 대선’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선거 과정으로 오래 기억될 대선이기도 하다. 특히 투표와 관련된 몇몇 사건은 정치학과 미디어학에서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를 던져줬다.
먼저 높은 사전투표율이다. 사전투표는 별도의 신고 없이 전국 사전투표 장소 3507개소에서 신분증 확인만으로 투표를 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처음 실시되는 이번 사전투표는 5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진행됐는데, 이번에 참여한 유권자 수가 11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유권자 4명 가운데 1명이 이번 사전투표에 참여한 셈이지만 대체로 대선 투표율이 80%를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총투표자의 30%가 넘는 숫자인 셈이다.
투표율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실 투표율보다 투표함을 지키고자 하는 시민의 감시다.
전국 투표소에서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현장을 밀착 감시하겠다고 시민들이 직접 나섰는데, 이들은 ‘시민의 눈’이라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직접 만들어 각 투표소에서 의심스러운 상황이 보일 때 곧장 버튼을 눌러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3000여 명의 시민이 각 지역에 사전투표함이 보관된 선관위 사무소 앞을 지키며 24시간 정보를 공유한 것이다.
둘째는 ‘투표용지’ 소란이다. 투표용지가 두 종류라는 주장이 소셜 네트워스 서비스(SNS)에서 확산되면서 선거관리위원회는 물론 정치권까지 나서 사실이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표 결과로 인정된다는 유권해석까지 받았다.
하지만 투표용지 괴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개표 이후 투표용지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듣고 나면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은 정보통신 기간망이 전국 곳곳에 깔려 있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이 세계 최고인 정보통신기술(ICT) 국가인데 왜 2017년 대한민국에서는 유권자가 투표장까지 직접 가야 하고 여전히 종이에 도장을 찍는 방식의 투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을까.
◆전자정부 세계적 확산…아프리카도
종이에 도장을 찍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노동력과 비용을 초래하는지는 투·개표 과정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전투표 결과가 담긴 투표함은 자물쇠를 채우는 봉쇄 작업과 봉인 스티커를 붙이는 봉인 작업을 거쳐 관할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 내 별도의 밀폐된 장소에 보관된다. 해당 장소는 폐쇄회로(CC)TV와 보안 업체, 경찰의 연계 순찰 등을 통해 감시된다.
선거 당일에는 투표 종료 후 1만3000곳이 넘는 투표장에 무장 경찰관이 2명씩 배치돼 투표함을 개표소로 이송한다. 개표 시작을 전후해 경찰은 전국 개표소 251곳에 각각 60여 명의 경찰력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본투표 당일 동원 경찰력만 투표소 경비에 4만979명, 투표함 이송에 2만7482명, 개표소 관리에 1만5060명 등 총 8만4414명에 달한다. 전체 경찰력 14만569명 중 60%에 달하는 수치다. 비용과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요구되는 과정인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이 주요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디지털 역량을 활용함으로써 파괴적인 변화에 적응하거나 이를 추진하는 지속적인 프로세스로 정의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기업은 물론 다양한 조직에서 디지털 혁신에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으로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부 역시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자정부(e-g
overnance)’다. e-거버넌스는 ICT에 기초한 온라인 시스템이다. 사회문제 해결에 거버넌스적 접근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디지털로 정부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기존 전자 행정(electronic government)의 발전 형태로 볼 수 있다.
e-거버넌스는 정부 업무 효율성·생산성·투명성 개선뿐만 아니라 기업·비정부기구(NGO)·주민들의 참여를 늘린다.
공공 서비스의 품질과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과 집행, 공공 서비스 제공 과정에 관한 기준과 절차 관련 정보 공개, 토론, 의견의 제출 기회 제공 등을 통한 이해관계인 간의 상호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중심으로 주민·NGO·기업 등의 광범위한 참여를 강조한다.
디지털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빠르고 정확하며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따른 경비 절감, 인건비와 시간 절약 등의 부수적인 장점들도 많다. e-거버넌스는 이미 많은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선 2009년 오바마 정부 출범 때부터 투명하고 열린 정부 부처를 만들기 위해 공식 웹사이트(data.gov)를 개설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케냐에서는 2004년에 ‘e-gov’가 생겼다. 아시아에서도 방글라데시·인도·이란·말레이시아·미얀마·네팔 등에서 활성화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2002년 정부의 승인하에 ‘e-러시아’를 2010년 완성해 사용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에스토니아는 가장 눈여겨볼만한 나라다. 현재 e-gov의 이름하에 정부의 공공 서비스뿐만 아니라 전자투표·교육·재판·의료·경찰·세금·비즈니스·은행대출까지 가장 광범위한 범위가 포함된다.
에스토니아는 발트3국의 최북부에 자리하고 있다. 1940년 구소련에 편입됐다가 1991년 독립했다. 면적 4만5000㎢에 인구는 132만여 명으로 작은 나라다. 에스토니아의 e-거버넌스는 적은 인구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가장 획기적인 시스템은 ID카드다. 이 카드만 있으면 세금·은행·교육·투표·비즈니스 등록 등을 할 수 있다. 일종의 사이버 주민등록증으로, 한국에서 하는 모든 로그인 서비스를 이 카드 하나로 대체한다고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인구가 적어 모든 공공 서비스를 일대일 민원으로 시민들에게 제공하려면 인구의 절반이 공무원이 돼야 한다. 그래서 인력 낭비를 방지하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자 민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금 환급은 물론이고 투표나 비즈니스 등록도 집에서 바로 완료할 수 있다. 경찰 시스템도 연결돼 있어 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의 신원 조회가 바로 가능하고 간단한 의료 정보도 열람할 수 있어 병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 처방전은 병원에서 바로 자신이 지정한 약국으로 전송되며 약을 더 타기 위해 병원에 들를 필요도 없다. ◆에스토니아의 e정부 성공 비결 4가지
에스토니아가 이렇게 e-거버넌스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정부 주도의 효율적인 시스템 도입이 결정적이었다. e-정부 시스템은 도입부터 불필요한 과정을 없애고 간소화했다.
ID카드의 도입으로 본인 증명 방식을 단일화했고 디지털 서명(e-signature)으로 접수와 확인 절차를 진행했다. 공공 서비스 사무실에서 일일이 도장을 찍고 발급하는 문서를 모두 전자화한 것이다.
둘째 성공 비결은 시민들에게 경제적 이득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정부가 처음 만든 전자 서비스(e-service)는 세금 환급이었는데 시민들은 변호사 비용을 아끼고 환급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약해 3~4일이면 세금 환급 금액이 은행에 입금된다.
또 2002년 ID카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발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ID카드를 보여주고 버스표를 사면 30%의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버스표를 사기 위해 ID카드를 만들었고 현재는 할인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개인 자동차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 정도로 부수적 효과도 올렸다. ID카드에 따른 대중교통 이용 증가는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중교통 시대의 혁신을 이끌었다.
전자투표는 투표용지 인쇄나 개표에 드는 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였고 디지털 서명만으로도 국내총생산(GDP)의 2%를 절약할 수 있다.
셋째 비결은 규제를 없앤 간소화된 시스템으로 이용자들의 시간 낭비를 없애준다는 것이다. 세금 환급은 신청과 환급이 빨라졌고 투표는 집에서 직접 하게 되며 회사를 새롭게 만들 때에도 30분이면 컴퓨터 앞에서 법적 절차가 끝나게 된다.
특히 이렇게 간소화된 시스템은 기업에서 환영받는 환경으로 비즈니스와 정부를 연결하는 빠른 통로가 되며 스타트업들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성공 비결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e-거버넌스의 기반이 되는데, 에스토니아는 정부가 투명성과 개방성을 보장하겠다는 기조를 통해 사회 혁신을 이끈다. 즉 에스토니아 정부는 정부가 먼저 투명해질 테니 기업과 기관도 투명해지라고 말한다. 정부의 행정 서비스나 대부분의 정보가 개방됐으니 기업 역시 이를 통해 사회적 투명성을 강화하자는 의미다.
그 결과 기업은 이익과 재무제표는 물론 얼마의 세금을 언제 냈는지까지 공개돼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 관련 통계를 공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투명성과 개방성의 문화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이를 통해 파트너십을 맺고자 하는 기업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됨으로써 경제적인 면이나 속도 면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변화의 시작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있었지만 종이 서류를 이용한 전통적인 방법과 전자 방식을 공존시키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유지했고 전자 방식 사용으로 천천히 유도해 나갔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에서 전자투표(e-voting)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세대는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라고 한다. 굳이 투표장까지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 과정도 우리와 많이 다르다. 투표는 11일 동안 이뤄지고 시작 후 7일 동안 마음이 바뀌어 이미 투표한 결과도 변경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한국과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국토가 작고 인구는 한정돼 있으며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고 관광지도 아니며 외세의 침략도 잦았다. 집집마다 통신망이 잘 구축돼 있고 스마트폰 이용률이 높은 디지털 강국이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에스토니아는 기술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제한된 조건하에서 나라를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전자투표, 기술 문제 아닌 신뢰의 문제
앞서 얘기한 이번 대선의 두 개의 해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투표함을 감시하고 투표용지 문제를 제기한 이 사건의 공통점은 불신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불신, 정부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불신의 결과가 이러한 웃지 못할 사건을 발생시킨 것이다.
e-거버넌스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에스토니아는 정부가 먼저 투명하게 공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전자정부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장점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2007년 국가적 차원의 해킹 시도가 있었지만 피해가 미미하고 3일이 지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복구되면서 전자 시스템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가 더 올라갔다. 이번 대선에서는 높은 사전투표 결과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이 전체 투표율이 80%를 넘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결과는 77.2%에 그쳤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왕설래하지만 60대 이상의 투표권자가 전체의 약 24%에 이르는 고령화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외출이 쉽지 않은 어르신들이 투표장까지 찾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앞으로 투표율이 높아질 근거는 찾기 힘들다. 반면 전자투표는 직접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5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전자투표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호주·스페인·브라질·인도·영국·일본 등에서 선거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며 선거 부정과 안전의 이유로 채택하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인 것이다. 투명성과 개방성에 기반을 둔 e-거버넌스를 통해 정부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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