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플라자 합의설’솔솔, 역키코 사태 터지나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 이후 오랜 만에 ‘스트롱맨(strong man)’ 체제가 재구축되고 있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1월 취임했다. 같은 해 5월 ‘강한 프랑스’를 주창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북핵 위협에 따른 일본 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베 신조 총리도 장기 집권 의욕을 드러냈다. 올해 3월 이후 스트롱맨 체제는 더 가시화됐다.
양회 대회를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시황제’로 부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024년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해져 이오시프 스탈린에 이어 ‘차르’ 반열에 올라섰다. 사민당과 대연정이긴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16년 동안 집권이 가능해졌다.
◆세계는 지금 ‘스트롱맨’ 시대
스트롱맨은 자체적인 특성상 자국과 자신의 이익을 중시한다. 트럼프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에서 출발했지만 중국이 맞대응할 태세다.
달러 약세 정책에 대해서는 자국 통화 평가절하보다 미국에 더 불리한 탈(脫)달러화로 대응하고 있어 종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양상이다. 중국이 원유 결제 등에 달러화 대신 위안화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다.
보호주의는 스트롱맨이 추구하는 국익 달성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 보호주의지수(미국 헤리티지재단의 자유무역지수)와 국익 상징 지표(무역수지)를 회귀 분석한 결과를 보면 무의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롱맨일수록 ‘갈등과 대립’보다 ‘협력과 공존’이 더 필요한 근거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 전쟁이 함무라비법전(이에는 이, 귀에는 귀)식 대응으로 치닫고 있지만 타협을 위해 물밑 협상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1, 2위 수출국인 중국과 미국의 틈새에 끼여 있는 한국은 복잡하다. 가뜩이나 북·중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한·미 간 금리 역전, 제2 외환위기설, 한국판 플라자 합의 논쟁 등 메가톤급 현안들이 당면해 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국판 플라자 합의’ 논쟁이다. 플라자 합의는 1980년대 초 국제수지 불균형의 주범인 미국과 일본 간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엔화 강세를 유도하기 위한 합의를 말한다. 10년 동안 지속됐던 플라자 체제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240엔대에서 79엔대로 폭락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경제는 소니와 도요타로 대변되는 막강한 제조업 경쟁력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급속히 진행된 엔화 강세의 부담으로 ‘디플레이션 탈피’를 공식 선언한 3월까지 장기간 침체를 겪었다.
제2 플라자 합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국가는 중국과 한국이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마찰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위안화 가치가 연일 절상되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의지가 반영되는 중국 환율제도 특성상 위안화 가치를 올려 고시하는 것은 미국과의 무역 마찰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시각에서 플라자 합의 가능성이 나오는 배경이다.
위안화 절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학수고대해 오던 관심사이자 과제였다. 대선 기간부터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약속해 온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 공약을 지키지 못해 부담을 느껴 왔다.
미국 무역 적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도 위안화 절상은 필요하다.
중국도 부담이 되긴 하지만 위안화 절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위안화 국제화 과제,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편입,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을 통해 국제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 중심의 팍스 시니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전 통화로서 위안화 기능이 높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위안화 절상 나선 중국과 상황 달라
하지만 고비 때마다 환율로 어려움을 겪어 온 한국은 중국과 사정이 다르다. ‘키코(KIKO)’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융 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것으로 예상한 수출 업체를 중심으로 환 헤지를 했다.
하지만 ‘마진 콜(증거금 부족)’을 당한 미국 금융사의 디레버리지(투자 자산 회수)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해 환차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는 키코 사태의 정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역(逆)키코 사태’다. 2015년 12월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달러 강세)할 것으로 우려한 수입 업체(글로벌 투자 금융사)를 중심으로 이번에는 반대로 환 헤지를 걸어놓았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자 이미 상당 규모의 환차손을 보고 있다. 달러 투자자도 마찬가지다. 3월 말 기준으로 개인의 달러 예금은 130억 달러가 넘는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할 때마다 달러 예금이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
Fed의 추가 금리 인상에 따른 달러 강세 기대가 남아 있거나 언제든지 높아질 수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을 겨냥해 이기적으로 달러를 사들인 결과로 이해된다.
곤혹스러운 것은 한국의 외환 당국이다. 역키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면 트럼프 정부로부터 환율 조작국에 지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한국판 플라자 합의를 수용해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 키코 사태 이상으로 환차손이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 현 정부가 처한 어려운 여건이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력은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출범 이후 1년 동안 미국의 이익만 생각하는 ‘극단주의 보호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오히려 무역 적자가 늘어났다. 11월 열리는 중간선거 이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트럼프 대통령과 집권당인 공화당이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과 함께 풀어야 한다. 환율은 통화 간 교환 비율로 근린 궁핍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일방적으로 오르고 내릴 수 없어 수익률이 적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스트롱 맨 체제와 메가톤급 현안이 겹친 틈을 타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것은 한국 경제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이기주의적 행동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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