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이례적 주가 상승 기억해야…2015년 중국과 2016년 미국도 ‘닮은꼴’
[한경비즈니스 칼럼=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시간은 측정 단위가 아니라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말이다. 그는 시간을 ‘지속’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시계와 달력은 지속되지 않는 시간이다. 2018년과 2019년은 인간이 구분해 정했을 뿐이다. ‘과거·현재·미래’는 동일한 시간을 하나의 틀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베르그손은 ‘지속하는 시간’에 주목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눈 균일한 시간이 아닌 강물과 같은 흐름의 시간이다. 시간을 불연속이 아닌 연속하는 변화로 파악한 것이다.
◆2009년과 2019년의 ‘유사점’ ‘지속의 시간’은 순간이다. 미래도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이다. 과거·현재·미래를 가르는 기준은 무의미하다. 변화는 단절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순간이 지속적으로 쌓여갈 뿐이다.
베르그손의 생각은 새롭지 않다. 희랍인 또한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두 단어로 나눠 사용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심리적이자 상대적인 시간이다. 시계로 가늠하는 시간과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어떤 순간이 지속될 때 변화가 진행된다. 금융시장의 변덕을 추적하다 보면 순간은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생각의 흐름이 왔다 갔다 한다. 어떤 순간은 길어도 선명하고 어떤 순간은 짧아도 흐릿하다. 동일한 시간을 다르게 느꼈기 때문이다. 기억을 쫓아가며 데이터를 뒤져봤다. 세 개의 순간이 선명하다.
처음의 순간은 2009년 4월이다. 런던에 G20 정상들이 모였고 이틀간의 논의 뒤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글로벌 공조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기대했지만 성명서 내용은 기대에 못 미쳤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선언문의 29항만으로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필자의 기억 속에는 그랬다. 하지만 주가는 달랐다. 금융 위기 당시 코스피지수의 저점은 2008년 10월 말(892)이다. 반면 이익 추정치는 2009년 3월 초까지 하향 조정돼 약 4개월 정도 주가와 이익은 반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이 주가수익률(PER)은 상승하는 흐름을 보였다.
2019년 상황도 유사하다. 코스피지수는 1월 바닥을 형성했다. 반면 이익 추정치는 여전히 하향 조정이 진행 중이다. 어닝 시즌이 마무리되며 하향 조정 폭이 둔화됐지만 반등했다고 말할 레벨은 아니다. 주가는 소폭 반등하고 주당순이익(EPS)은 하향 조정되며 PER은 10배를 뛰어넘었다. 2009년 주가의 바닥과 EPS의 바닥 사이에서 PER은 7.1배에서 11.2배까지 51% 상승했다. 2019년에는 1월 초의 주가 바닥과 (아직 EPS 바닥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PER은 8.5배에서 10.4배로 22% 상승했다.
2009년과 2019년의 시간은 떨어져 있지만 이익 추정치 급락이라는 순간을 공유한다. 2018년 10월 말부터 지금까지 약 4개월 동안 코스피지수의 12개월 선행 EPS 추정치는 19.9% 하향 조정됐다. 20%에 가까운 하향 조정인데 이는 금융 위기 시기(2009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다. 물론 당시에는 같은 기간 동안 이익 추정치가 32% 하향 조정된 만큼 둘째로 빠른 이익 추정치 하향 조정이라고 할지라도 금융 위기에 근접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만약 2009년 당시 11배의 밸류에이션이 부담스러워 투자를 미뤘다면 이후 2009년 3월부터 2009년 9월(1723)까지 40%(코스피 기준) 상승으로 이어진 지속의 시간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3월 대비 40%의 주가가 오른 2009년의 9월에도 코스피 PER은 여전히 11.7배 수준이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이것이다. 주가의 변곡점 부근에서는 주가와 이익 추정치 사이에 시차가 발생하며 이 구간에서는 PER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변곡점의 PER을 과거 일반적 수준의 PER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해 매력도를 판단한다면 자칫 투자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의미다.
◆데자뷔, 2015년의 중국과 2016년의 미국 둘째로 선명한 기억은 2015년의 중국이다. 경제지표가 부진하더라도 수급과 통화정책의 힘으로 주가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2014년 7월 이후 중국의 구매관리자지수(PMI)는 지속 하락해 50을 밑돌았다. 중국은 대출금리를 2014년 9월부터 인하하기 시작해 2015년 8월까지 기존 6%에서 4.35%까지 떨어뜨렸다. 2015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저우샤오촨 인민은행 전 총재는 주가 상승이 경제에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고 이후 보험사 자금과 후강퉁(상하이·홍콩 간 증시 교차거래)을 통한 외국인의 자금 유입이 증시에 호재로 작용하면서 2015년 6월 주가를 5200까지 끌어올렸다.
2019년 2월 데자뷔가 예상되는 것은 2015년 때문이다. 지난해 미·중 무역 갈등 격화와 함께 과도한 디레버리징 작업에 따른 중소·민간기업 신용경색 문제는 제조업 PMI의 하락을 부추겼다. 제조업 경기 부진은 크레디트 리스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7월 이후부터 디폴트는 민간 기업 회사채를 중심으로 급증했다. 대형 기업의 제조업 PMI는 50을 웃돌고 있는 반면 중소기업의 제조업 PMI는 50을 밑돌면서 경기 부진의 우려를 자극하고 있다.
2015년과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는 통화정책에 변화를 줬다. 지난해 11월 ‘대출 쿼터제’를 시행한 데 이어 선별적 중기 유동성 지원 대출(TMLF) 도입, 기습적 지준율 인하 등 인민은행의 가용 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특히 ‘은보감회’를 통해 그림자 금융으로 대표되던 자산 관리 상품(WMP)을 지난해 9월부터 제도권으로 편입한 데 이어 12월부터 이를 통한 대출 확대까지 장려하는 중이다. 과거와 다른 점은 금리 인하를 제외한 모든 가용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 정도다. 이에 힘입어 중국 증시는 3000까지 급반등했다. 중국의 정책 의지가 반영되는 ‘지속의 시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셋째, 현재는 2016년 3월의 순간과 겹치는 지속의 시간이다. 2016년 2월 재닛 옐런 미국 중앙은행(Fed) 전 의장이 ‘고압 경제’라는 생소한 용어를 언급한다. 고압 경제는 경기의 수요가 조금 높은 수준을 보이더라도 금리가 경기를 띄울 수 있는 압력을 줘야 한다는 개념이다. 당시 Fed는 물가 목표제에 대한 대안으로 ‘인플레이션 양방향 목표’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2%를 달성하더라도 Fed가 무조건 금리를 인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민간의 수요가 살아날 때를 기다리자는 의미였다.
2019년 들어 Fed 위원들이 자주 쓰는 단어가 ‘물가수준 목표제’인 배경도 동일하다. 이는 장기간 저물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2%를 웃도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는 정책을 말한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2018년 12월 “대칭적 방식 등으로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달성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넘어가는 구간과 2018년에서 2019년으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Fed는 통화정책의 변화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 ‘물가 목표제’라는 개념을 바꿀 이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에는 차이가 크지만 Fed의 스탠스 변화는 묘하게 닮아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우리는 동일한 강에 두 번 돌아갈 수 없다”. 강물은 흐르고 어제와 오늘의 강물은 다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의 강은 다르더라도 다른 시간에 존재할 뿐 동일한 강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는 동일한 강에 여러 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근거다. 2009년, 2015년, 2016년의 순간은 현재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2019년 3월 바로 이 순간과도 연결된다. 이익 사이클이 급감하는 구간에서 PER이 10배를 넘어 전진했던 2009년, 중국의 통화정책이 중국 증시 상승을 이끌었던 2015년, 옐런 전 의장의 Fed가 고압 경제를 제시했던 2016년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과거 강렬했던 순간이 기억 저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현실화할 때가 있다. 과거를 현실화하는 힘은 바로 ‘지속’이고 순간의 지속은 변화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부족할 때 변화가 시작된다. 지난 1월 이후 증시에 대한 일관된 의견은 ‘기대에 진입해야지 확인 후 진입하면 늦는다’는 단순한 원칙이었다. 3월 역시 한국 증시를 동일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직 ‘좋아짐의 순간’은 기대일 뿐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5호(2019.03.11 ~ 2019.03.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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