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재단 장학생 출신 염재호 전 고대 총장, SK 이사회 의장 내정으로 화제

-최종현 전 회장이 1974년 사재 출연해 설립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지난 3월 초 SK그룹의 지주사인 SK(주) 이사회 의장에 염재호 고려대 전 총장이 내정됐다. 3월 27일 정기 주총에서 염 전 총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이 예정대로 통과되면 최태원 SK 회장은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 대표이사로 경영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해외 박사 1000여명 배출"...SK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숨은 힘
염 전 총장의 의장 내정은 대학 총장 출신이 주요 그룹 지주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게 됐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염 전 총장과 SK와의 오랜 인연이다. 그는 SK그룹 공익재단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SK그룹이 주최하는 행사에 패널이나 진행자로 참여하며 인연을 이어 왔다.

1974년 설립, SK그룹의 사회공헌 활동의 본산

한국고등교육재단은 고(故) 최종현 SK 전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고등교육재단은 1974년 설립돼 4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민간 기업 재단 가운데 효시에 해당하는 곳은 1939년 삼양사가 설립한 양영회다. 이후 1960년대 중반 삼성미술문화재단(1965년)과 연암문화재단(1969년) 등이 설립됐고 1970년대 들어 확산되기 시작했다. 국내 기업들이 부를 축적하고 상속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최 전 회장이 특히 장학 사업에 힘을 실은 이유는 해외 유학 도중 학업을 접어야 했던 사연에서 비롯된다.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최 전 회장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학업을 접고 중도 귀국해야 했다. 경제학 공부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후진 양성에 대한 의지로 이어졌다. ‘미국 일류 대학 박사과정’ 지원이라는 재단 장학 성격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고등교육재단은 SK가 세운 기업 재단이면서 SK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점이 독특하다. 최 전 회장은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키운다는 뜻에서 SK재단이나 최종현재단이 아닌 한국고등교육재단으로 명칭을 정했다. 최 전 회장은 재단 설립과 함께 충북 충주의 헐벗은 산을 사들여 가래나무 150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30년 후 나무가 자라면 목재를 생산해 장학 사업의 종잣돈을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그 후 30년이 훌쩍 지나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내에서 순수 장학 재단으로 45년의 역사를 가진 곳은 고등교육재단이 유일하다. 최태원 회장 체제를 맞은 SK그룹은 SK(주)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가치 창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은 행복나눔재단을 통해 전문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있고 각 계열사별로 특성에 맞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SK의 사회공헌 활동의 본산은 장학 사업에 있다.

재단 장학생 출신이자 고등교육재단 이사인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등교육재단은 기업 경영의 돌파구가 아닌 인재 양성이라는 사회적 책임으로 처음 시작됐고 더 큰 규모의 기업 장학 재단이 없어지는 와중에도 현재까지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건 없는 지원, 순수 학문에 집중

‘순수 학문 지원’, ‘조건 없는 지원’. 고등교육재단의 장학 제도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운영돼 왔다. 교육 재단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27기 해외 유학 장학생인 류정민 고려대 연구교수는 “인문학 분야의 지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재단을 통해 한학 연수 장학생으로 3년간 훈련받은 후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 5년간 학비 전액과 생활비 지원을 조건 없이 받았다”며 “어떤 결과물도 요구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 걷는 길을 믿고 격려해 줬다”고 말했다.

한학 연수 장학생은 동양학 관계 연구를 원하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3년간 한학의 기본 경전과 주요 전적을 교육하는 과정이다. 국내 장학 재단 가운에 인문학, 특히 한문학을 지원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최 전 회장의 부인인 고 박계희 여사가 동양학에 관심이 많았던 데서 싹이 텄다. 전통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상순(1914~1999년) 선생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전문적인 한학 교육의 뜻을 품었던 것이다.

장학 지원의 핵심인 ‘해외 유학 장학생’ 제도는 사회과학·순수자연과학·정보통신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해외 박사과정을 지원한다. 초창기에는 경제학을 비롯한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에 집중하다 최태원 회장 체제에 들어서면서 응용 분야로, 정보통신 분야의 장학생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응용 분야를 추가한 것은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관련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최 회장의 생각이었다.

순수 학문 집중 지원은 장학 재단이 설립될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다. 당시 한국의 장학 지원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고 주로 공학 분야에 치중됐다. 반면 사회과학 분야의 지원은 많지 않았다. 재단 장학생 출신인 박윤수 KDI 연구위원은 “최 전 회장의 생각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리더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박 연구위원은 또한 “국내외에 경제학자가 많아 자칫 특정 그룹의 편의를 봐줄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떠한 의무나 요구 사항도 없었다”며 “공부하는 도중에 감사 편지를 쓰라는 타 기업 재단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고등교육재단은 기업과 재단을 분리해 운영하고 그 원칙을 설립 이후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는 점이 의미가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동안 장학 재단을 통해 어떤 인재들이 배출돼 왔을까. 대표적으로 경제학 분야에서는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이 유명하다. 한국인 첫 하버드 종신교수 박홍근(화학) 교수, 동양계 최초의 예일대 학장 천명우(심리학) 교수, 존스홉킨스대 블룸버그 석좌교수 하택집(물리학) 교수, 이진형 스탠퍼드의대 신경과 겸 스탠퍼드공대 바이오공학과 교수, 박지웅 시카고대 화학과 교수 등 석학들도 있다. 염 전 총장과 김용학 연세대 총장은 함께 유학길에 나선 뒤 두 라이벌 대학의 총장이 됐다. 해외 일류 대학 박사 지원에 집중한 결과 학계나 연구 기관에 종사하는 인재가 주를 이룬다.

반면 정부 기관과 기업에서 활약하는 재단 출신은 손에 꼽힌다. 왜일까. 고등교육재단은 ‘인재 양성의 산실, 학문 네트워크의 허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인력 풀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개의 길이 있었다. 직접 인재를 키우거나 혹은 인재를 키우는 교육자를 배출하는 것이다. 고등교육재단은 후자를 선택했다. 최 전 회장에게는 교육자와 연구자를 육성해 한국의 인적자원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리고 45년 동안 1000여 명의 해외파 박사가 배출됐다. 장학 재단은 나무를 심는 역할을 한 것이다. 국내외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 이들은 수많은 줄기를 뻗어 후학 양성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 말 그대로 ‘학문 네트워크’를 이룬 셈이다.

고등교육재단은 최근 연구 기능을 강화하는 중이다. 최종현학술원 출범이 그 일환이다. ‘드림 렉처(Dream Lecture)’와 같은 청소년 대상 강연 프로그램과 해외 초청 강연에도 힘을 싣고 있다. 크게 보면 장학에서 연구와 교육으로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이재열 교수는 “세계적인 우수 인재 형성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개별 장학과 연구 기능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교육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기여할 필요가 있다”며 “미래 교육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재단의 역할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해외 박사 1000여명 배출"...SK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숨은 힘
"해외 박사 1000여명 배출"...SK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숨은 힘
chari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7호(2019.03.25 ~ 2019.03.3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