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인터넷의 근간을 만든 암호학자들…‘국가’ 범주 넘어선 글로벌 공급 사슬망 곧 나올 것
산업과 금융의 큰 틀을 바꾼 ‘암호 기술’
(사진) 독일의 암호 시스템 ‘에니그마’를 풀어내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암호 해독기 ‘콜로서스’.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전 세계 70여 개국을 결제로 묶겠다는 IBM의 월드와이어 발표 이후 암호화폐 가격이 모처럼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 제시 룬드 IBM 블록체인 총괄책임자는 월드와이어가 은행을 없애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월드와이어가 SWIFT와 같은 국제 송금의 표준과 같다고 했다.

SWIFT는 은행 간 암호 통신 규약이다. 은행을 거대한 장부들 간의 네트워크라고 규정하자면 SWIFT는 이 장부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하는 플랫폼이다. 제시 룬드의 말은 SWIFT가 은행을 없애지 않았듯이 월드와이어도 은행을 없애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는 오히려 IBM의 거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일 수 있다.

IBM은 세계적으로 400여 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IBM이 SWIFT와 같은 국제 결제의 표준을 주도하려고 한다는 것은 블록체인상에서 금융·물류·정보기술(IT)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다.

비트코인은 이제야 10년이 됐지만 이와 비슷한 방식, 즉 암호를 활용한 강력한 도구에 대한 열정은 오래됐다. 가상화폐라는 단어로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저변을 이루는 암호 기술에 대한 인류의 오랜 갈망을 담아낼 수 없다.

암호 기술은 전쟁과 함께 발달했다. 전파 발명 이후 치러진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암호 기술은 전투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컴퓨터를 ‘튜링머신’이라고도 하는데 계산 기계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앨런 튜링 같은 천재들이 전쟁 중에 암호 해독 작업에 참여했다. 암호 기술에 대한 경쟁이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암호는 적에게 노출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지므로 노출돼도 되는 내용과 노출되면 안 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자기편에게 받은 암호는 코드북을 활용해 해독할 수 있다. 암호문에 적힌 숫자가 사전에 약속한 어떤 책의 장과 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게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가로챈 적은 그 코드북이 ‘성경’일지 ‘브리태니커사전’일지 아니면 특정한 해의 전화번호부일지 알 수 없으므로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코드북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빼앗길 가능성도 높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은 독일의 침몰한 전함에서 발견한 코드북을 활용해 독일의 암호 체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코드북’ 전쟁의 승패를 가르다

코드북과 같이 자기편끼리만 공유하는 복호 도구를 열쇠라고 한다. 그런데 전자 서명을 활용하면 열쇠를 공유하지 않고도 암호를 전달할 수 있다. 이중 잠금 장치는 전자 서명의 기본 얼개를 잘 설명한다.

철수가 갑수에게 비밀 메시지를 상자에 담아 보내려면 열쇠도 같이 보내야 한다. 그런데 열쇠를 보내지 않고도 갑수만 열어보게 할 수 있다. 철수는 자신의 자물쇠와 열쇠로 잠근 상자를 갑수에게 보내고 갑수 역시 자신의 자물쇠와 열쇠로 상자를 잠근 뒤 이를 다시 철수에게 돌려보낸다.

철수가 자신의 자물쇠를 열어 보내면 갑수는 자신의 자물쇠를 이용해 비밀 메시지를 꺼낼 수 있다. 서로가 공통의 열쇠를 공유하지 않고서도 비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다. 게다가 상대방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비밀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누가 보냈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 메시지를 자기만이 열 수 있다는 사실이 서로 공유되면 믿을 수 없는 상대방과도 소통하고 거래할 수 있다.

온라인 뱅킹에서 입력하는 비밀번호는 일종의 전자 서명이다. 만약 은행 서버가 고객들의 비밀번호를 보유한다면 나쁜 마음을 먹은 은행 직원들이나 해커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돼버린다. 은행은 고객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비밀번호를 통해 그 고객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정수의 독특한 특성이 활용된다. 아주 큰 두 소수를 곱해 특정한 수를 얻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수를 인수분해해 두 개의 소수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즉 고객의 비밀번호를 암호화하면 하나의 소수가 나오는데 은행은 고객과 연결된 수를 이 소수로 나눈다. 이 때 나눠지는 값이 소수라면 해당 고객이 입력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전파를 가로채거나 서버를 해킹해도 원래 고객의 비밀번호를 알 수 없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전자 서명을 활용한 결제가 주목받았다. 전자 서명을 활용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티은행은 전자 서명을 활용한 전자화폐를 만들었고 미국 재무부로부터 시범 운영을 허가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쇼핑과 송금 산업이 거대 금융회사들의 주도로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암호 전문가들을 빨아들였다. 순수한 전자 서명 기반의 화폐에 대한 꿈은 소수 이상주의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산업과 금융의 큰 틀을 바꾼 ‘암호 기술’
(사진)현대적 컴퓨터의 개념을 정립한 암호학자이자 수학자인 앨런 튜링.


◆‘전자 결제’와 함께 성장한 인터넷

그러면 왜 이상주의자들은 전자 서명만 활용하는 인터넷 화폐를 만들고자 했을까. 은행이나 신용카드가 온라인에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암호 기술을 순수한 전자 서명 화폐로까지 밀고 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말처럼 단순히 지적 능력의 한계를 탐험하고자 했던 것일까.

순수한 전자 서명 기반의 암호화폐는 정부의 방해를 강하게 의식한 발명품이다. 금융회사가 고객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금융회사의 서버를 통째로 동결할 수 있다. 또 정부는 인쇄기를 돌리거나 연방은행의 장부를 바꾸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화폐량을 늘릴 수도 있다.

IBM과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이 물류와 금융을 통합하는 플랫폼을 블록체인에 기반해 설계하려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정부들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운 글로벌 공급 사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같은 강력한 정부는 IBM 본사를 봉쇄하거나 임원들을 기소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이 정부가 그런 방식으로 월드와이어를 멈춰 세우기는 어렵다. 블록체인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 그간 참여할 수 없었던 지구촌 시민들이 대거 합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그 이유는 블록체인이 편리해서라기보다 정부들의 방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돋보기] 디지털에 물리적 속성 부여한 ‘이중 지불 방지’ 기술

비트코인은 e메일 발명 이후 최초로 성공한 이중 지불 방지 전송 시스템이다. 인터넷에서의 파일 전송은 물리적인 사물의 배달과 다르다. 무한히 복제되는 디지털의 속성상 사실상 원본은 이동하지 않는다. 전자적 신호의 이중 지불 방지는 은행과 같은 중재자가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지던 문제였지만 비트코인은 한 번 보낸 메시지를 다시 보낼 수 없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비트코인의 발명으로 디지털 코드에 물리적 실체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음원이나 사진 파일도 남에게 보내면 자신에게 남지 않는다. 마치 전자적 사본이 아니라 원본을 스마트폰에 담고 다니는 것과 같다.

전자 서명 암호화폐를 꿈꾸던 천재들에게도 비트코인의 이중 지불 방지 기능은 기대 이상의 발명품이었다. 비트코인의 발명으로 전자적 코드와 물리적 실체에 대한 개념적 경계가 일부 무의미해졌고 아직까지도 원본성(originality)을 가진 전자신호의 확장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의 상상력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산업과 금융의 큰 틀을 바꾼 ‘암호 기술’
글 =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8호(2019.04.01 ~ 2019.04.0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