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누진제 완화 받고 ‘요금제 개혁’ 쐐기 박은 한전…‘현실화’ 성공 여부 주목
-에너지 전환·한전공대 등 정책 비용 ‘눈덩이’
-소액주주들 “한전은 대통령 공약 집행 기관 아닌 주식회사”
한전, 전기요금 개혁 ‘스타트’…요금 인상·적자 개선 두 마리 토끼 잡을까
[한경비즈니스=안옥희 기자]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가 ‘주택용 누진제 개편안’을 수용하고 그에 따른 재무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기요금 체계 개편 방침을 공식화했다. 그동안 정부 반대에 부딪쳐 번번이 무산됐던 ‘전기요금 현실화’의 물꼬를 트면서 요금 인상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전력 수요가 많아지는 7~8월 전기요금을 월 1만원 정도 할인해 주는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이 진통 끝에 6월 28일 열린 한전 이사회를 통과했다. 앞서 6월 21일 한전 이사회는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이 한전의 적자를 가중하고 배임 가능성이 우려된다며 한 차례 보류 결정을 내렸다.

개편안이 시행되면 전국 1600만 가구가 전기요금을 월평균 1만142원 할인받게 되지만 한전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연간 2847억원에 이른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이사진이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약관 개정안을 의결하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전이 대규모 적자를 내는 상황이고 정책 시행에 따른 정부의 손실 보전책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배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이사회가 결국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정부가 결정한 사안에 대해 공기업인 한전의 이사회가 의결을 보류한 것은 이례적이다. 한전은 대형 로펌에 약관 개정안 의결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는지 법리 검토를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주주가 제기한 대로 누진제 개편안을 수용하면 배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한전, 전기요금 개혁 ‘스타트’…요금 인상·적자 개선 두 마리 토끼 잡을까


◆ 공기업 딜레마 속 요금 현실화 ‘첫발’

의결 보류 결정 이후 1주일 뒤인 6월 28일 이사회는 논의 끝에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과 함께 정부가 합의한 전기요금 체계 개편 방안을 함께 통과시켰다.

전기요금 누진제 민·관 태스크포스(TF)가 권고한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을 수용하는 대신 개편안 시행에 따른 한전의 재무적 손실을 보전하는 방안을 반영한 것이다.

한전은 7월 1일 한국거래소 공시를 통해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관련 사항과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의 합리적 개선이 포함된 전기요금 개편 방안을 내년 상반기까지 내놓겠다고 밝혔다.

한전이 밝힌 전기요금 개편안의 핵심은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의 폐지 혹은 수정·보완 △누진제 폐지 혹은 국민이 스스로 전기 사용 패턴을 고려해 다양한 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적 전기요금제 등으로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국가 에너지 소비 효율을 높이고 전기요금의 이용자 부담 원칙을 분명히 해 원가 이하의 전력 요금 체계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는 내용 등이다.

한전은 “이 같은 내용의 전기요금 개편안을 오는 11월 말까지 마련하고 내년 6월까지 정부 인가를 받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전이 공시한 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체계 개편 방침은 사실상 한전 측이 그동안 주장해 온 전기요금 인상을 위한 방안과 다르지 않다. 김종갑 한전 사장은 줄곧 ‘두부장수론’을 펼치며 원재료인 콩이 제품인 두부보다 비싼 현실을 지적하며 요금 인상의 불가피함을 설명해 왔다.

올해 1월 기자간담회에서도 김 사장은 “2018년 원가 이하로 판 전력이 4조7000억원에 달했다”며 연료비 변동을 전기요금에 반영하는 전기 도매가격 연동제 도입의 필요성과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한전이 폐지하거나 축소하겠다고 밝힌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는 현재 1단계(0~200kWh) 사용자에게 매달 최대 4000원을 할인해 주는 제도다. 이 제도를 통해 지난해 958만 가구가 3964억원의 혜택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누진제 확대에 따른 저소득층 보호를 위해 도입됐지만 취지와 달리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전기 사용량이 적은 고소득 1인 가구에도 할인 혜택이 주어지는 등 왜곡 현상이 발생해 수정·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한전, 전기요금 개혁 ‘스타트’…요금 인상·적자 개선 두 마리 토끼 잡을까
연봉 2억원이 넘는 김 사장 본인도 필수 사용 공제 혜택 대상으로 알려지면서 제도 폐지 또는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필수 사용 공제가 폐지되면 전기요금 인상 효과가 발생해 정부는 보편적 복지 제공 차원에서 제도 폐지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여 왔다.

필수 사용 공제가 폐지되면 한전은 연간 약 4000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한전이 사실상 전기요금 인상 내용이 담긴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 등 전기요금 개편 방안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이번 누진제 개편안 시행에 따른 적자는 만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요금 체계 개편만으로 한전의 재무구조가 단기간에 나아질 수 없다는 점이다. 탈원전·탈석탄·재생에너지 확대 등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인해 발전비용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지만 손실을 보전할 곳이 마땅하지 않다.

전기요금 ‘현실화’를 추진하려고 해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현 정부 임기인 2022년까지 전기요금 인상은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전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최근 자회사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한전 측은 이 계획이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른 것으로 최근 적자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선 적자가 계속 커지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해석이 분분하다.

한전은 지난 4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자회사인 한전전력기술과 한전산업개발에 대한 보유 지분 매각 계획을 밝혔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한전은 매년 사업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공시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전은 현재 보유 중인 한국전력기술 지분 65.77% 중 14.77%와 한전산업개발 지분 29% 전량을 매각 가능한 지분으로 공시했다.

한국전력기술은 일부 지분을 매각해도 여전히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한전산업개발은 지분 전량 매각을 계획 중이다. 자회사 지분 매각을 통해 한전은 약 1080억원(한전기술 750억원, 한전산업개발 330억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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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금제 손대도 정책비용 탓 적자 불가피

현재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뿐만 아니라 정부 에너지 정책 변화와 연료비 가격 상승, 한전공대 설립 등 재무구조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정책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점도 문제다.

특히 한전공대는 설립 비용에만 7000억원, 운영비로 연간 50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이지만 설립 비용 조달 방안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와 한전 중 누가 천문학적인 설립·운영비용을 부담할 것인지를 두고 벌써 삐걱대고 있다.

정책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한전 실적은 악화 일로다. 곽대훈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전의 정책 비용은 6조2983억원이다. 이는 2016년(4조1860억원)과 비교해 33.5% 급증했다. 올해 1분기에도 정책 비용만 1조5111억원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전은 실적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이 통과되고 전기요금 체계 개편안이 내년 상반기로 미뤄지며 적자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 2분기 순적자는 984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9186억원보다 적자 폭이 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 신용 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7월 11일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개편안과 비우호적인 규제 환경이 한전의 재무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S&P는 전기요금이 발전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요금에 적정 원가와 적정 투자 보수가 반영되도록 설계돼 있지만 실제 요금이 원가에 직접 연동되지 않고 정기적으로 조정되지도 않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또 한전의 공적 역할을 강조하는 전력 정책 기조가 단기간에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면서 유의미한 수준의 요금 인상이 없다면 한전의 재무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전 소액주주 단체인 한전소액주주행동은 7월 4일 이언주 무소속 의원 등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 성윤모 산업부 장관, 주영준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 등을 형법상 강요 혐의로 고발했다고 밝혔다.

김 사장과 이사진 등 한전 측 관계자들은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소액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탈원전 정책에 따른 한전의 손실 △2018년 여름철 주택용 전기요금 할인에 따른 손실을 정부가 부담한다고 해놓고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은 것 △30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이 예상되는 여름철 주택용 전기요금의 이사회 가결 △한전의 800억원 상당의 평창 동계올림픽 후원 △한전공대 설립 계획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에 따른 것이다.

장병천 한전소액주주행동 대표는 “한전은 법에 명시된 ‘총괄원가’만 지켜도 손해를 볼 수 없는 회사다. 주식회사인데도 포퓰리즘으로 전기요금을 운영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기요금에 원가 반영이 안 돼 요금 상승 요인이 있어도 가격을 조정하지 않았다. 광고가 필요 없는 회사인데도 정부 입김에 따라 2018년 2월 평창 올림픽 때 800억원을 기부하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대통령 공약 사업인 한전공대 설립을 추진하는 등 주주 이익을 대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주식회사 한전은 대통령 공약을 수행하는 기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전이 전기요금 체계 개편 방침을 밝히면서 요금 현실화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소액주주로부터 고발을 피하지 못하면서 공기업으로서 공공성과 뉴욕 증시까지 상장된 주식회사라는 기업성이 충돌하는 딜레마가 재확인된 셈이다.

2018년 4월 취임과 동시에 비상 경영 체제를 선포하고 “공익성과 기업성이 조화롭고 균형 있게 발현되는 공기업이 돼야 한다”며 “한전이 공공성을 추구하되 원가 효율성이 있어야 하고 주주 이익을 도모하되 국가 이익에도 부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김 사장의 취임 일성은 정부와 주주 사이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


ahnoh05@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3호(2019.07.15 ~ 2019.07.2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