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와 육성 동시에 추진하는 미국·일본…한국도 더 늦기 전에 ‘제도화’해야
[케빈 리 해시드 심사역] 국내 벤처캐피털(VC)에서 근무하는 지인들을 만날 때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블록체인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혹은 “개념이 막연하지만 투자할 방법도 마땅하지 않아 답답하다” 정도로 요약된다. 스타트업은 물론 삼성이나 페이스북 같은 대기업까지 블록체인 실험에 뛰어들고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는 등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국내 규제 환경은 여전히 경직돼 있어 민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한국 정부는 2017년 과열된 암호화폐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암호화폐 거래소를 폐쇄한다고 밝히고 암호화폐 공개(ICO)를 전면 금지함으로써 광풍을 잠재우려고 시도했다. 동시에 금융위원회의 가이드라인 아래 블록체인 업체의 암호화폐 거래를 목적으로 한 법인 계좌 발급 제한 등의 강력한 조치를 연달아 발효시켰다. 이러한 강경 기조는 자연스럽게 한국벤처투자와 중소벤처기업부의 벤처 투자 가이드라인에도 반영됐다.
지난 정권부터 추진한 모험 자본 확대는 현 정권에서도 이어져 매년 벤처 투자액이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벤처 투자 실적은 4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3조4000억원 수준이었던 지난해 투자액을 크게 웃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과 비교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모험 자본 비율이 낮아 앞으로도 더 많은 돈이 시장에 풀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2의 벤처 붐으로 시장이 활성화되는 듯 보이지만 현장에선 정책 자금에 과도하게 기댄 국내 벤처 투자시장이 정부나 관련 부처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스타트업 육성이나 기술혁신은 뒷전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국내에서 벤처 투자 조합을 결성할 때 정부자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33%에 육박한다. 블록체인 혁신이 과도기를 관통하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국내 VC들은 규제 당국의 무심함과 장기화되는 제도 공백 안에서 신기술 발전을 위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 블록체인 결제 플랫폼을 내놓은 신현성 티몬 의장.
과거 교훈 삼아 빠른 제도화 필요
정부가 사용처와 펀더멘털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새로운 형태의 자산으로부터 투자자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취지는 너무나 당연하다. 또 한국이 관련 버블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 또한 반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블록체인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장려한다면서 정작 기술 발전이나 진흥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이 암호화폐 거래에 관한 규제 법안만 발표하는 정부의 대처는 아쉬운 부분이다. 신기술은 초창기에 빠르게 실행하고 전환하며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성장기에서 버블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20년 전 등장한 인터넷은 시대의 혁신으로 주목받으며 다양한 창업가의 모험 정신을 자극했다. 닷컴 버블로 회자되는 당시 미국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인터넷 기업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디어와 두루뭉술한 사업 계획만으로 자금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아무런 경영 성과 없이 주식시장 상장에 성공하는 사례가 생겨났고 시장은 이에 더욱 많은 자본으로 반응했다. 결국 버블은 붕괴됐고 이후 투자자들은 특정 시장의 존재 여부나 성장률과 같은 정량적이고 수익과 직결된 지표에 더 집중하며 성숙해졌다. 또한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의 상장 문턱이 한결 높아지는 효과도 나타났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마존·구글·야후·페이스북과 같은 기업들이 연달아 등장하며 인터넷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이미 블록체인은 지난해 암호화폐 시장의 처참한 붕괴를 겪으며 경쟁력이 없는 프로젝트와 단순 투기를 조장하던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을 잃어 갔다.
시장이 조정되는 동안 이웃 국가들은 제도 정비에 앞장섰다. 늘 정보기술(IT) 분야의 혁신을 주도해 온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를 필두로 현존하는 투자 유치 규정을 암호화폐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보완했다. 최근에는 미니 기업공개(IPO)로 불리는 ‘레귤레이션 A+(Regulation A+) 제도’를 준수한 프로젝트의 암호화폐 발행을 전격 승인하기도 했다. 레귤레이션 A+는 실제 IPO에 준하는 공개 절차를 요구하며 암호화폐의 발행이 부적절한 투자 유치나 투기에 노출되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기술 도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법제화와 표준화를 꼽는다. 위와 같은 사례는 정부가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모범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상원 무역·과학·교통위원회는 7월 블록체인 진흥법을 승인하며 실무 그룹을 발족시켰다. 이 실무 그룹은 각 산업 전문가와 함께 블록체인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정부 차원의 연구를 촉진한다는 취지로 운영된다.
일본도 지난해 ICO 관련 법제화를 주도한 히라이 다쿠야 중의원을 과학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자금결제법을 암호화폐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는 등 범정부 차원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도 보안이나 암호화폐 사기와 같은 문제들이 계속 제기되지만 무작정 금지하기보다 규제와 혁신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클레이튼·테라 등 대형 프로젝트 등장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강력한 키워드 아래 시행된 국내 규제 샌드박스는 희망적인 부분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월 신기술과 서비스가 기존 법령의 미비나 기존 규제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임시로 시장에 출시하고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했다. 이러한 움직임 덕분에 모바일 고지서, 공유 주방 등의 다양한 시도들이 가능해졌다.
일례로 최근 크게 성장한 전동 킥보드 시장은 지난 3월 시속 25km 이하의 개인형 이동 수단에 대한 자전거 주행도로 허용과 운전면허 면제로 모멘텀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4월 금융 규제 샌드박스 혁신 기업에 블록체인을 활용한 개인 주식 대차거래 플랫폼인 디렉셔널이 선정된 것도 고무적이다. 규제 샌드박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금지된 행위가 아니면 일단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전환에 있는 만큼 그 범위가 블록체인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확대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카카오·삼성·테라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블록체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카카오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을 출시했고 삼성 또한 갤럭시 폰에 암호화폐 지갑과 댑(Dapp : 분산 애플리케이션) 브라우저를 탑재시키며 기술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커머스 기업 티몬을 창업한 신현성 의장이 이끄는 테라 역시 블록체인을 활용한 간편 결제 플랫폼인 차이페이를 선보이며 출시 한 달 만에 가입자 15만 명을 달성하는 등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탈중앙화된 분산 원장 기술인 블록체인은 인증된 기록이 영속하는 특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 콘트랙트 기능을 사용해 단순 금융거래에서부터 물류 관리까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또 플랫폼의 네트워크 효과가 특정 국가에 구애되지 않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블록체인이야말로 내수 시장에 국한돼 있는 스타트업 생태계에 활로를 열어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술의 장려와 동시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산 종류인 암호화폐의 정의·의의·목적 등을 고려한 규제까지 아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변화를 앞에 두고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기술력과 자금을 모두 갖춘 한국이 유연하지 못한 규제 환경으로 주도권을 내주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5호(2019.07.29 ~ 2019.08.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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