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 기업 문화 혁신 탐방② 오렌지라이프]
-오렌지라이프, 애자일 도입 1년 반…15분 ‘스탠드업 미팅’ 등 빠른 의사결정·업무속도 체감

“상사 위한 보고서 쓰던 직원들, 이젠 성과 낼 방법 먼저 고민하죠”
[한경비즈니스=안옥희 기자] 6~9명 정도 되는 팀원들이 매일 아침 사무실 한쪽에 있는 화이트보드 앞에 모여 15분간 그날의 업무 내용을 공유한다. 보드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직원들이 그날 해야 하는 업무 내용이 적혀 있다.

주변에는 파워포인트(PPT)로 만들어진 두꺼운 보고서도, 서류를 올려두는 테이블도 없다. 심지어 앉을 의자도 없다. 최고경영자(CEO)와 경영진 회의 시간 역시 예외 없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글로벌 기업인 구글의 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국내 생명보험 회사인 오렌지라이프(구 ING생명)에서 매일 15분간 진행되는 ‘데일리 스탠드업 미팅’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2018년 4월 국내 기업 중 선도적으로 애자일(agile) 조직을 도입한 오렌지라이프는 애자일 문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 고객 중심 혁신, 애자일에서 찾아

오렌지라이프는 애자일을 중심으로 조직 문화를 혁신했다. 애자일 조직들이 외부 환경 변화에 민첩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고객 중심의 혁신을 만들어 낸 덕분이다. 애자일 도입 1년 반이 된 지금 직원들은 업무 수행 방식에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특히 수동적으로 주어진 업무만 하던 직원들이 이제는 스스로 업무에 대한 오너십을 갖추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 직원은 “예전에는 기획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면 먼저 PPT부터 열고 어떻게 하면 상사에게 통과되는 기획안을 쓸지 고민했다”며 “하지만 애자일 도입 이후 보고서 중심의 문화가 사라졌고 해당 업무 전문가인 내가 성과를 가장 잘 낼 방법을 먼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렌지라이프가 애자일을 도입하게 된 계기는 애자일로 당장 성과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014년 정문국 사장이 오면서 오렌지라이프는 성과 문화 전반에 대한 턴어라운드 프로젝트를 시행했고 그 과정에서 더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더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내적인 욕구와 뉴노멀·디지털라이제이션 시대로 대표되는 외부 환경 변화 등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혁신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 정 사장이 구상한 오렌지라이프의 새로운 비전이었다.

정 사장은 “고객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혁신하는 조직을 만들자”며 벤치마킹 대상 기업을 찾아 주요 경영진과 함께 해외 곳곳을 누볐다. 해외 출장도 CEO 등 톱 매니지먼트(고위 간부)가 직접 챙겼다.

오렌지라이프의 퀀텀 점프를 위한 조직 혁신 방식 찾기에 골몰하던 정 사장의 눈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이미 자리 잡은 애자일 조직과 문화가 들어왔다. 정 사장과 고위 간부들이 직접 가서 애자일을 눈으로 확인하고 승인해 줬기 때문에 기존과 완전히 다른 업무 수행 방식이었지만 실제 도입, 적용하기까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애자일의 성공 전략은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오렌지라이프에 적합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 결과 개방형의 테스트런(test-run)이 탄생했다. 애자일을 중심으로 한 오렌지라이프 조직 문화 혁신의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오렌지라이프는 하다가 안 되면 그만둘 수 있는 파일럿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 도입하겠다는 일념으로 애자일을 도입했다. 기존 일하던 사무 공간에 스쿼드(애자일 그룹의 소그룹)로 테스트런 팀을 시험 삼아 설치한 결과 다른 직원들이 테스트런 팀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애자일 문화를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고수해 온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인트라넷과 타운홀 등을 통해 임직원의 변화 관리에도 공을 들였다. 오렌지라이프 관계자는 “테스트런과 투명한 콘셉트가 오렌지라이프에 애자일 문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차별화 포인트가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상사 위한 보고서 쓰던 직원들, 이젠 성과 낼 방법 먼저 고민하죠”


◆ 방향에 대한 고민은 리더의 몫


애자일로 전환되면서 경영진의 업무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20년 넘는 직장 생활에서 검토하고 도장만 찍던 경영진이 이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원들 사이에서 함께 일해야 할 정도로 바빠진 것이다.

애자일 조직에서는 앞으로의 전략 방향(what)과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why)에 대한 결정은 톱 매니지먼트라고 불리는 리더들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피라미드형의 수직적인 체계에서 실무진이 만들어 놓은 보고서를 보고 결정하던 기존의 업무 방식과는 360도 달라진 것이다.

관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how)에 대해서는 애자일 조직의 직원들이 자유롭게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권한 위임을 하게 됐다.

이런 역할 변화 과정에서 달라진 업무 방식으로 인한 혼선도 물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정 사장과 임원들이 논의하는 회의 룸(think what)이다. ‘왜(what)’에 대한 고민을 혼자 하기 어렵기 때문에 크로스 펑셔널로 같이 고민하기 위해 정 사장은 이 회의 룸을 만들었다.

애자일로 전환되면서 오렌지라이프는 중간 관리자에게 플레잉 코치라는 역할을 주고 능동성을 부여했다. 그 덕분에 조직이 역동적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합(合)을 이루기까지 관리자들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직원들도 마냥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자율성에 대한 만족감은 생겼지만 자신의 업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감이 공존했다. 그런데도 애자일이 오렌지라이프의 조직 문화 혁신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다.

오렌지라이프가 내부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애자일을 통해 직원들은 업무에 대한 책임감과 자존감이 높아졌다는 응답이 많았다. 직원들은 애자일을 중심으로 정해진 보고 양식 없이 집단지성을 활용하면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 업무 속도가 빨라진 점 등을 체감하고 있다.


[인터뷰]

“애자일은 유행 아닌 시대정신…실패 용인하는 문화가 성공 좌우”

“상사 위한 보고서 쓰던 직원들, 이젠 성과 낼 방법 먼저 고민하죠”


국내 애자일 경영의 대표 사례로 평가받는 오렌지라이프의 애자일 경영 실무 책임자인 오민 상무는 “애자일은 계획하는 조직이 아닌 실행하는 조직”이라며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회사가 실패를 용인하고 축적의 힘을 믿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에서 온 경영전략인데 수직적인 체계의 국내 기업에도 적용할 수 있나.

“애자일은 형식보다 실질적으로 나인 투 식스(오전 9시에서 오후 6시)에 맞춰 일할 수 있는 문화에 적합하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주52시간 근무제라는 노동환경의 변화에도 애자일은 굉장히 적합하다고 본다. 스타트업에서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있지만 일반 기업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3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획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애자일은 빠르게 실행하는 조직이라 실패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보완하면서 다시 실행하는 것이 곧 애자일 정신이다. 경영진이 과감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직원들이 실행하면서 계속 수정, 보완하는 것이 애자일의 핵심이다. 실패도 축적해 놓으면 결국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 빨리 실패하고 빨리 수정할 수 있도록 실패를 용인하고 축적의 시간을 믿어주는 회사 분위기가 애자일의 성공을 좌우할 것이다.”

-애자일을 도입해 성과를 봤나.

“성과를 더 내기 위해 애자일로 전환했다기보다 애자일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처럼 한 명의 리더가 지시를 내리고 밑에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이 시대에 맞는 조직은 아닌 것 같다. 수직적인 하이어라키(계급) 조직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이어라키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 지금 젊은 세대를 하이어라키 조직에 담을 수는 없다. 새로운 세대를 담기 위해 애자일이 필요하다.”

-애자일 문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CEO(톱 매니지먼트)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 애자일을 하기로 했으면 유행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라고 믿고 끝까지 가봤으면 좋겠다. 관리자들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들이 기존에 누렸던 편안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관리자급이라고 윗세대처럼 편하게 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관리자도 기득권을 내려놓고 같이 일해야 한다.”


ahnoh05@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9호(2019.11.04 ~ 2019.11.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