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시작해 롯데를 재계 5위로 키워
평생 '기업보국' 실천...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타계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롯데그룹 창업자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30분께 별세했다. 향년 99세.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일본에서 성공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그룹을 재계 5위로 키웠다. 그는 노환으로 지난달 중순부터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음력)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해 신문과 우유 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신 명예회장은 남다른 부지런함으로 외지에서 문학도의 꿈을 불태우며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했다.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우며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평소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 본 한 일본인 투자자의 출자 덕분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한 채 문을 닫게 되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뛰어난 안목과 신용,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오늘날의 ‘롯데 신화’를 창조해 냈다.

◆문학 청년 신격호, ‘껌’으로 열도 석권

신 명예회장은 1940년대 초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팔이, 우유 배달 등의 일을 하면서 일본 와세다대까지 고학했다.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며 첫 사업부터 시련을 겪었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사업 재개 1년도 채 안돼 적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 사업가 신격호의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당시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면서 현지에서는 껌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신 명예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타고난 사업 감각을 발휘해 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껌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었다.

껌으로 큰 돈을 번 신 명예회장은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었다. 롯데의 탄생이었다.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왔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일본 성인들이 껌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면서부터다. 껌이 서구 문명의 상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신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당시 일본에서 껌의 핵심 타깃이 어린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오히려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신 명예회장은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껌을 대고 불 수 있도록 풍선껌과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롯데의 풍선껌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단순 식품으로 인식되던 껌을 장난감 개념으로 발전시킨 신 명예회장의 안목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고국 투자’…현해탄 경영의 시작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인사말)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조국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보국이라는 기치 아래 폐허의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롯데는 이후 국내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현 롯데푸드) 등을 통해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다.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롯데는 또한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에도 진출했다.

롯데월드타워, 대한민국 랜드마크 우뚝

신 명예회장은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를 국내 랜드마크로 키워내는 데에도 일조했다. 그는 서울 잠실 석촌호수 동호를 중심으로 종합관광단지(당시 명칭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 잠실 지구를 한국을 대표하는 복합 관광명소로 키워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롯데는 이를 위해 1982년 제2롯데월드사업 추진 및 운영 주체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1988년 1월 서울시로부터 사업 이행에 필요한 부지 8만6000여㎡를 매입했다. 이듬해 실내 해양공원을 중심으로 호텔, 백화점, 문화관광홀 등을 건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 하지만 일부 조건 미흡으로 반려됐다.

이후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한 신 명예회장의 지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교통, 도시 계획 등의 이유로 사업계획이 연이어 반려됐던 것이다. 단순한 백화점이나 쇼핑시설, 아파트 등을 건설하면 충분히 사업성이 있는 부지였다. 신 명예회장은 그러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제2롯데월드 건설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빌딩을 포함해 80만5782㎡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 허가가 최종 승인됐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2014년 10월 롯데월드몰과 아쿠아리움을 시작으로 시설들을 순차적으로 오픈했다.

롯데는 2017년 4월 3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초고층빌딩을 포함한 롯데월드타워를 그랜드 오픈했다. 30여 년에 걸친 신 명예회장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롯데월드타워는 국내 최고층 건물이자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고용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서울의 랜드마크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국내 관광산업 활성화에도 앞장서는 중이다.


신 명예회장의 장례는 롯데그룹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과 23호실이다. 발인은 22일 오전 6시다. 영결식은 같은날 오전 7시 롯데월드타워 내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장지는 울산 울주군이다.

롯데 관계자는 “거화취실을 실천한 고인의 뜻에 따라 조의금과 조화는 받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choi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