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Ⅰ]
-4대 그룹, 인공지능 분야에서 수혈 활발…글로벌 기술 경쟁 속 사라지는 ‘순혈주의’
스쳐가는 ‘용병’에서 미래 이끌 ‘주전’으로…외국인 임원 ‘전성시대’
[한경비즈니스=안옥희 기자]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그룹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외국인 리더들에게 힘을 싣고 있다.

외부에서 영입한 인재를 요직에 기용하는 ‘열린 인사’는 최근 들어 가장 주목할 만한 재계 인사 트렌드다. 신기술 선점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순혈주의는 무너진 지 오래다. 기업들은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앞다퉈 국경 없는 인재 영입에 나서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자 글로벌 격전지로 부상한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외국인 임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국적보다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해진 시대를 맞아 경영 일선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리더들을 살펴봤다.

◆ 삼성, ‘네온’ 만든 인도 과학자 파격 승진

삼성그룹이 1월 21일 단행한 2020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는 삼성전자의 외국인 임원들의 승진이 눈길을 끌었다. 최연소 전무와 상무 자리를 모두 외국인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천재 과학자’로 유명한 프라나브 미스트리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 싱크탱크팀(TTT) 팀장은 삼성전자 최초의 30대 전무가 됐다. 프라나브 전무는 1981년생(39세)으로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0’에서 인공 인간 프로젝트 ‘네온(NEON)’을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한 주인공이다.

인도계인 그는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미디어랩 출신으로, 2009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식스센스’ 아이디어를 강연 프로그램 ‘TED(테드)’에서 발표하면서 글로벌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다. 삼성전자에는 2012년 입사해 파괴적 혁신을 담당하는 SRA 싱크탱크팀을 이끌고 있다.

그는 2009년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선정한 ‘세계를 이끌 젊은 과학도 35인’에 이름을 올렸고 2013년에는 세계 경제 포럼(WEF)이 뽑은 ‘젊은 글로벌 리더’에도 선정돼 입사 때부터 천재급 인력으로 손꼽혔다.

입사 2년 만인 2014년 33세의 나이에 삼성 최연소 상무로 승진했다. 그는 당시 삼성전자의 웨어러블 기기인 갤럭시 기어 새 모델을 제안했고 360도 3D 영상 촬영 카메라 등 혁신 사용자 경험(UX) 개발을 주도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2017년 전무급인 SVP(시니어 바이스 프레지던트)로 승진했고 2019년 10월까지 삼성전자 모바일 부문 ‘혁신 총괄’을 맡았다. 2019년 9월부터는 SRA 산하 연구소인 스타랩스를 설립해 인공 인간 프로젝트 ‘네온’ 개발을 이끌었다.

네온은 스타랩스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기술인 ‘코어 R3’에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적용해 만든 인공 인간이다. 스타랩스는 미국에서 ‘코어 R3’ 특허를 신청하면서 ‘영화·TV·인터넷 플랫폼 등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상 캐릭터를 창작·편집·조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라고 설명했다.

올해 프라나브 전무의 파격 승진에는 인공 인간 프로젝트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로보틱스 콘셉트 발굴과 핵심 기술 확보, 사내 벤처 조직인 스타랩스를 신설해 AI 기반 서비스 개발을 추진하는 등 신사업 발굴에 기여했다”고 승진 배경을 밝혔다.

특히 삼성전자의 올해 임원 인사에서는 연령·국적·연차와 상관없이 성과와 역량을 보유한 인재들을 과감하게 발탁하는 ‘성과주의’ 원칙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결과 외국인인 마띠유 아포테커 경영지원실 기획팀 상무가 최연소 상무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마띠유 상무는 프라나브 전무와 1981년생 동갑내기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제조공학을 전공하고 MIT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나왔다. 보스턴컨설팅·IBM·액센츄어 등 글로벌 다국적 경영 컨설팅 기업을 거쳐 2010년 삼성에 합류했다. 삼성전자는 그에 대해 “경영 전략과 인수·합병(M&A) 전문가로 5G·AI 등 신기술 바탕의 패러다임 변화 주도를 위한 잠재기업 M&A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마띠유 상무가 성사시킨 인수 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동안 삼성의 유망 기술 기업 발굴에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은 최근 몇 년간 소프트웨어·AI·5G 관련 스타트업에 대한 선제 투자와 인수에 집중해 왔다.

2014년 미국 스마트싱스(IoT 플랫폼), 2015년 미국 루프페이(모바일 결제)를 비롯해 2018년 미국 케이엔진(AI 검색 엔진)과 스페인 지랩스(5G), 2019년 이스라엘 코어포토닉스(멀티 카메라) 등을 인수했다.
스쳐가는 ‘용병’에서 미래 이끌 ‘주전’으로…외국인 임원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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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 3대 핵심 요직에 외국인 리더


현대차그룹 역시 글로벌 기업 타이틀에 걸맞게 외국인 임원들을 폭넓게 기용하고 있다. 특히 현대·기아차의 핵심 분야인 회사 운영·연구개발(R&D)·디자인 등 3대 조직의 수장 모두 외국인 임원의 손에 맡겼다.

실적 개선과 동시에 미래 기술을 선점해야 하는 현대차로서는 50년 역사상 전무했던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정의선 체제’의 현대차는 순혈주의를 깨고 미래를 이끌 능력 있는 외부 영입 인재를 적극적으로 중용하면서 조직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2019년 4월 닛산 출신의 호세 무뇨스 사장을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미주권역담당 및 북미권역본부장으로 선임했다. 현대차의 전 세계 판매와 생산 전략을 책임지는 중책을 외국인 임원에 맡긴 것이다.

현대·기아차의 연구개발본부장(사장)을 맡고 있는 알버트 비어만 사장은 2015년 독일 BMW의 고성능 라인업인 M의 개발담당자에서 현대차로 자리를 옮겨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N’의 성공적인 출범을 이끌었다. 그의 영입에는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이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어만 사장 영입 당시 현대차는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양적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사업 전략을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술력을 부각할 수 있는 고성능차 개발이 중요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그가 BMW에서 고성능차의 개발을 총괄했던 경력을 높이 샀다. 결국 비어만 사장은 현대차 역사상 최초로 연구개발본부장에 발탁된 외국인 수장이 됐다. 그동안 관행처럼 이어 오던 순혈주의를 깬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차에서 고성능 브랜드 N을 진두지휘하며 낸 성과를 바탕으로 2019년 3월 외국인 임원 최초로 사내이사에도 올랐다. 그가 이끄는 N 사업부가 i30 N과 벨로스터 N 등을 차례로 시장에 안착시키며 현대차에 요구됐던 고성능 모델에 대한 갈증을 푸는 동시에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정 수석부회장이 강조하는 ‘디자인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사람도 외국인이다.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경영 담당 사장이다.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히며 자동차 명가인 아우디와 폭스바겐의 디자인을 총괄하다가 2006년 정 수석부회장의 삼고초려 끝에 기아차에 합류했다.

2005년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이던 정 수석부회장이 기아차의 디자인을 취약점으로 보고 디자인 경영을 추진하면서 슈라이어 사장을 기아차 디자인총괄책임자(CDO)로 발탁했다. 이후 그는 기아차 디자인의 정체성 확립과 혁신을 이끌어 냈다. 기아차 정체성을 대표하는 ‘호랑이 코(타이거 노즈)’ 그릴을 적용해 기아차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확립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 수석부회장은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사활을 걸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다수 영입했다. 벤틀리 수석디자이너 출신의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을 비롯해 2019년 9월 일본 닛산의 고급 브랜드인 인피니티의 수석 디자인 총괄인 카림 하비브 디자이너를 기아디자인센터장으로 앉혔다.

제네시스는 람보르기니 디자인 총책임자 출신의 필리포 페리니 디자이너를 유럽제네시스 선행디자인스튜디오 총책임자 상무로 영입했다.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해 디자인 경영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현대차 2종, 기아차 3종, 제네시스 2종 등 7개 차종이 미국 ‘2019 굿 디자인 어워드’에서 운송 디자인 부문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현대차는 글로벌 최고 전문가를 영입해 주요 핵심 부문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하는 등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량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향한 인재 영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19년 9월 ‘플라잉카’ 개발을 이끄는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사업부를 신설하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 항공연구본부장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인 신재원 박사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스쳐가는 ‘용병’에서 미래 이끌 ‘주전’으로…외국인 임원 ‘전성시대’
◆ ‘미래 먹거리’ 앞에 무너진 ‘순혈주의’


AI·배터리 등 미래 먹거리 기술 경쟁 앞에서 주요 그룹은 순혈주의 타파 기조를 이어 가고 있다. LG그룹은 AI 분야 글로벌 인재 영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LG그룹은 외부 수혈을 통한 AI 기술 역량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캐나다·러시아·북미·인도 등에 AI 연구·개발 거점을 두고 AI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LG전자는 2019년 말 AI 분야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조셉 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컴퓨터공학부 교수를 영입해 CTO 부문 산하 AI 연구소의 영상 지능 연구를 맡겼다. 조셉 림 교수는 2017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USC 컴퓨터공학부 교수에 임명돼 화제를 모았다. 그는 임원급 대우를 받으며 LG전자의 영상 지능 분야 연구를 주도할 계획이다.

앞서 5월 LG전자는 다린 그라함 박사를 토론토 인공지능연구소 연구소장으로 선임했다. 그는 세계적 AI 연구 기관인 벡터연구소의 창립 멤버이자 인공지능망 전문가다.

SK그룹에서는 외국인 리더 2명이 최근 임원으로 승진했다. 중국 사업 개발 전문가인 장웨이 SK이노베이션 배터리중국사업개발실장과 AI 전문가인 에릭 데이비스 SK텔레콤 글로벌 AI개발그룹장 겸 엔터프라이즈 AI 솔루션그룹장이 그 주인공이다.

에릭 데이비스 그룹장은 언어 기술 분야 전문가로, 애플에서 AI 음성 비서 ‘시리’ 개발과 음성 인식 사전 정리 등 개발을 이끌었다. 2019년 SK텔레콤에 합류해 차세대 AI 기술을 활용한 상품 프로토타입 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ahnoh05@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3호(2020.02.10 ~ 2020.02.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