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권력 자본으로 군림하며 미래 가로막는 ‘적폐’ 될 수도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어느 조직에나 충성과 헌신은 필요하다. 남남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서 서로 눈치만 보며 이해타산을 따지다 보면 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장서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에 나서는 용감한 군인이나 당장 성과로 나타나지도 않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회사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존경받아 마땅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보상이 따라야 한다. 공헌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고 다른 구성원의 귀감으로 삼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그런데 이런 보상으로 조직 혹은 공동체에서의 ‘권세’를 부여하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그가 조직 내에서 새로운 권력 자본이 돼 미래를 가로막는 적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례1 : ‘권력’이 된 K 사장


지난 40년 동안 온갖 험한 일을 다해 온 K 사장. 한때 훌륭한 성과를 거두며 조직에 헌신했다. 그 결과 형님처럼 모시던 선대 회장이 “고생했으니 사장 한번 해보라”며 그를 사장에 임명해준 지 10년이 됐다.

하지만 그 사이 세상도 회사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젊은 직원들은 물론이고 사업부장들이 하는 얘기를 알아들을 수 없고 해외 경쟁자나 사업 파트너들과 만나면 난감할 따름이다.

어느새 회사에 짐이 되는 느낌이지만 쉽게 물러날 수도 없다. ‘실세 사장’을 하느라 신세진 회사 안팎의 ‘내 사람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월급쟁이에 불과한 자신을 믿고 따라준 고마운 사람들도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 생활인들이니 어쩔 수 없다.

자연히 회사 내부 조직은 K 사장의 눈높이를 넘어서고 이들의 집단 이익에 반하는 전략을 구상할 수 없게 된다. 과거의 충성과 헌신을 사장 자리라는 권세로 보상한 결과 조직의 미래를 가로막는 구체제가 생겨버린 셈이다.

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조직이나 공동체의 책임을 맡기는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실전에서 검증된 인재이니 믿음직스럽고 ‘신상필벌’의 원칙에도 맞는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이 미래에도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성공에는 능력보다 운이 더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고 그 능력도 달라진 세상에는 맞지 않는 과거의 유물인 경우도 있다. 더욱이 과거 성공했던 일은 새로 맡는 일과 아예 차원이 달라 능력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충성과 헌신이라는 자발적 선의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보장도 없다.

사장의 과거 성과와 공헌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권세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중간 정산’을 하는 편이 낫다. 세상 다른 일에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현금 보상이 제일 낫고 회사 사정상 적절한 보상 여력이 없다면 주식이나 스톡옵션을 주면 된다.

소신껏 회사 권력을 펴고 싶으면 그 돈으로 자기 사업을 하면 된다. 신세진 그의 사람들과 현금 보상을 나누거나 새 사업을 같이해도 된다. 충성과 헌신은 중간 정산 후 회사에 남아서도 소신껏 계속할 수 있다.

어려운 시절 회사에 기여했다고 무작정 사장의 권한과 책임을 맡기면 회사는 망한다. 한때 잘했다고 계속 맡겨도 망한다. 자리 대신 납품이나 대리점 같은 사업권을 주면 새로운 사업 파트너의 진입을 막아 역시 회사가 망한다.

에이스 투수나 홈런 타자에게 야구 감독 자리를 줘 보상하는 프로구단은 없다. 스타 선수가 받는 돈이 감독보다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막상 감독 일을 하려면 선수단 관리와 경기 운영, 코칭 스태프 관리, 구단과의 관계 등 여러 다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두 번 우승 감독을 했다고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프로 야구는 일정한 기간의 계약을 하고 성과 보상과 계약금으로 중간 정산을 한다.

◆사례2 : P 사장의 ‘가신 정치’


그러면 왜 더 크고 복잡한 기업 조직에서는 충성과 헌신을 권세로 보상하는 일이 벌어질까.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창업 50년 만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A산업은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는 미국 회사들 못지않은 파격적인 보상을 핵심 임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한 소재 사업을 맡은 사업부장과 IT 주변 기기 사업을 맡은 사업부장에게 100억원이 훌쩍 넘는 연봉을 각각 지급하고 또한 지난 20년 동안 회사의 재무와 관리 업무를 맡으면서 대주주 일가의 재산과 사업 이권을 불려준 P 사장(전략본부장)에게는 200억원이 넘는 연봉을 지급했다.

A산업의 대주주인 회장은 P 사장이 자기 마음대로 챙긴 사업 이권들이 불만이지만 당장은 그를 중심으로 짜인 회사의 지배 체제가 필요하다. 그가 회사 곳곳에 확보한 인적 관계와 비밀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회사의 미래 전략은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려는 대주주 일가와 자신의 체제를 지키려는 P 사장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사례를 보면 A산업의 대주주는 P 사장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편하게 회사를 지배하고 이득을 챙기는 사이 P 사장의 가신 정치에 휘감겨 버렸다. 일방적 충성을 바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머슴살이’가 되지 않으려는 P 사장의 자구책이 팽팽한 권력 게임으로 진화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충성과 헌신을 권세로 보상한 결과다.

대주주 회장은 당장 부리기 편해, 나중에는 얽힌 사연이 너무 많아 권세를 더해주다 보니 이젠 회삿돈까지 퍼주고 있는 셈이다.

P 사장의 막대한 보수 중 일부는 회사가 아닌 대주주 일가가 지급해야 한다. 회사의 체제를 갖추고 사업부들 사이의 시너지를 창출해 낸 업적에 대한 보상은 회사가 지급할 몫이지만 대주주 일가의 재산과 사업 이권을 불려준데 대한 보상은 대주주 회장이 부담해야 할 부분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A산업의 대주주 회장과 P 사장은 성과 보상이란 명목으로 회삿돈을 나눠 가진 셈이다.

P 사장의 사례는 회사가 아닌 특정 개인에 대한 충성과 헌신에 켜켜이 쌓인 이해관계와 비밀이 더해져 권력 자본으로 축적되고 다른 주주들의 몫이 포함된 회삿돈과 이권이 배당처럼 지급된 경우다.

충성과 헌신을 권력 자본으로 쌓은 P 사장의 권세가 커지면 실제로 돈을 버는 사업부들은 숨죽여 눈치만 보고 구성원들도 더 큰 이득과 권세가 보장되는 P 사장의 사례를 동경하기 시작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십상시의 권세’와 다를 바 없다.

◆사례3 : L 부장의 억울한 사연


L 부장은 자동차 회사에서 30년째 공장 일반 관리와 노무 관리 일을 하고 있다. 회사가 외국 기업에 매각될 때는 인수협상팀에서 대정부 관계와 언론 홍보를 지원한 적도 있다.

회사 곳곳에는 이런저런 회사 일로 알게 돼 그를 신뢰하는 선후배 동료들이 있어 어려운 일을 상의하고 있다. 노조 간부들과 협력 업체 사람들도 L 부장의 문제 해결 능력과 인간적 신뢰성을 인정해 중요한 협상의 고비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하지만 회사를 인수한 미국 G사의 한국법인 사장은 ‘경영은 숫자로 말한다’면서 엄정한 실적 평가에 기반한 성과 보상을 강조하니 L 부장의 능력과 헌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매출·원가율·불량률과 같이 명확하게 실적이 집계되는 분야와 달리 L 부장은 조직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유능한 경영자는 L 부장과 같은 기둥과 뿌리를 이루는 역할의 가치를 찾아내 보상하고 그 일에 맞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다. 전략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고 그 실천은 L 부장과 같이 조직을 통합하고 문제를 풀어 가는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철 지난 과거의 성공을 권세로 보상해 미래를 옥죄어 버리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수급으로 전공을 입증하라는 조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물길을 찾고 병참 자원을 모으는 부하들을 우대하고 이들이 제대로 된 관직을 얻을 수 있게 직접 과거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이 과거시험과 선박통행첩으로 선조와 대신들의 의심과 반발을 샀지만 말이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은 1970년대 당시 계약금액이 한국 총통화량 규모에 달하는 주베일항 공사를 수주해 완공시킨 엔지니어들에게 상상하기 힘든 큰 재산을 만들어 주면서도 계열사 경영을 맡기는 데는 신중했다고 한다.

우직한 엔지니어들이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자 일을 하다가 사내 정치에 휘말릴까 염려한 결과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자. 훌륭한 성과를 내면 돈으로 중간 정산하고 헤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다. 합당한 보상과 함께 더 큰 권한과 책임을 위한 경쟁 기회를 주면 된다.

천하무적의 기마 무사가 단위 부대장을 맡아 잘한다는 보장이 없고 총사령관을 하려면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장 전투를 잘한 병사들 중에서 부대장을 뽑아 지휘 경험을 쌓게 하고 부족한 능력을 채워준 뒤 사령관을 시키면 된다.

남다른 안목과 능력이 필요하다면 강태공이나 제갈량과 같은 외부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 기병 전투는 못해도 사령관은 잘할 사람이 중간에 도태돼 버릴 것 같다면 지휘관 재목을 미리 가려서 빨리 키우는 방법도 있다.

이 과정이 공정하고 기준이 타당하다면 특히 바닥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불우한 인재에게나 남다른 배경과 재능을 가진 행복한 귀공자에게나 공평하게 기회가 열려 있다면 그 군대는 강해진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승진은 더 큰 권한과 책임을 맡을 사람을 가리는 일이다. 이 과정이 권력을 나누는 정치로 변질되면 회사는 정치판이 돼 버린다. 정치 잘하는 사람이 사업 잘하는 사람을 휘두르며 부리기 시작하면 그런 회사는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망한다.

“고생했으니 사장 한번 하라”는 식의 막연한 관행, 만만한 사람 내세워 편하게 지배해 보려는 생각이 회사를 정치판으로 만든다. 환관 정치의 폐해도 그렇게 시작됐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4호(2020.02.17 ~ 2020.02.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