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요즘 ‘키다리 아저씨’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국내 유통업계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 총수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별명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아동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이런 별명을 얻었다. 유독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는 그의 모습이 마치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등장하는 키다리 아저씨를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지만 정 부회장의 별명이 널리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출연 중인 한 TV 프로그램이 계기가 됐다. 백 대표는 어려움에 빠진 감자와 고구마 농가를 위해 정 부회장에게 전화로 잇달아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마다 정 부회장은 즉각 대규모 물량의 감자와 고구마를 매입해 이마트와 신세계TV 홈쇼핑 등 유통 채널에서 판매하도록 했다. 재계 총수가 예능 프로그램의 전파를 탄 것도 이례적이지만 무엇보다 농가와의 ‘상생’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반응도 놀라웠다. 방송을 통해 매입한 감자와 고구마는 소비자들의 응원과 함께 완판 행진을 이어 갔고 그를 향한 호평이 쏟아졌다.
재계를 이끌고 있는 이른바 ‘회장님(최고경영자·CEO)’들이 달라졌다. 과거 대기업을 이끄는 수장들은 자신의 일상을 꽁꽁 숨긴 채 오로지 회사 경영에만 집중하는 행보를 펼쳐 왔다.
이 때문인지 ‘야전 사령관’, ‘기획통’, ‘혁신 리더’ 등과 같은 딱딱한 별명이 붙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대중에게도 냉철한 이미지로만 각인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모습을 벗어던지고 친근하게 스스럼없이 자신을 나타내는 회장님들이 많아졌다.
◆엔씨소프트 대표보다 유명한 ‘택진이 형’
정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인플루언서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일상이나 생각들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활발하게 공유해 왔고 그 결과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약 28만 명에 달한다.
이번 방송에서 고구마 매입을 결정한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고구마 상품 사진을 올리며 직접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게시물은 1000개가 넘는 댓글과 약 2만5000개의 ‘좋아요’를 기록했다.
친근한 이미지의 회장님 하면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를 빼놓을 수 없다. 일반인들, 특히 젊은 층에게 대표라는 직함보다 ‘택진이 형’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2017년 엔씨소프트에서 출시한 리니지M 광고에 직접 출연하면서 얻게 된 애칭이다. 이 광고 이전까지 김 대표를 몰랐던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거리에서 그를 보더라도 쉽게 알아볼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다.
지난해에도 신작 ‘리니지 2M’ 출시를 앞두고 ‘택진이 형’이라는 애칭을 부각한 광고를 한 번 더 공개해 이슈가 됐다. 김 대표가 직접 출연하는 대신 목소리를 입힌 광고 영상이었지만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어린이가 “택진이형, 밤 샜어요”라고 묻자 그는 친절한 목소리로 “일찍 일어나 일하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어린이가 “‘리니지 2M’ 언제 나오느냐”고 연이어 질문하자 출시일인 11월 27일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며 광고는 막을 내린다.
이렇게 쌓아 올린 긍정적인 이미지 덕분일까. 엔씨소프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던 올해 초 게임업계 최초로 전 직원 특별 유급 휴가 방침을 결정하자 ‘역시 택진이 형’이란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처럼 활발한 SNS 활동이나 자사 광고에 직접 출연하지는 않지만 회사 내부에서 파격적인 소통 행보를 펼치며 대중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는 회장님들도 눈에 띈다.
“과거엔 대기업에 입사해 10년 근무하더라도 회장님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런 부분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한 재계 관계자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주요 임원들과 주로 회의하고 대화를 나누던 회장님들이 최근에는 젊은 직원들과도 활발한 대화에 나섰다.
우선 최태원 SK 회장을 꼽을 수 있다. ‘행복 전도사’를 자처한 그는 지난해 내부 임직원들과 100회나 ‘행복 토크’라는 이름으로 만나 대화를 나눴다.
갑작스럽게 사내 게시판을 통해 저녁 시간이 비는 직원들을 모집한 뒤 ‘번개 행복 토크’를 열며 함께 식당에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직접 최 회장에게 사소한 질문을 건네기도 하며 친밀감을 높였다. 올해 신년회도 파격적이었다. 신년사 없이 일반 시민과 고객, 내부 직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2020년을 시작했다.
◆회장이 나서니 ‘경영 목표’ 명확해지는 효과 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도 직원과의 대화에 적극적인 리더라는 평을 받는다. 정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임직원들과 양재동 사옥에서 가졌던 ‘타운홀 미팅’은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임직원들은 그를 ‘수부(수석부회장의 준말)’라고 부르며 회사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특히 한 직원이 회사의 방향성에 대해 묻자 “미래에는 자동차가 50%, 30%가 PAV(private air vehicle), 20%는 로보틱스가 될 것”이라며 “(현대차는) 그 안에서 서비스를 하는 회사로 변모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구광모 LG 회장도 마찬가지다. 별도의 취임식 없이 바로 업무에 돌입했던 그는 임직원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자신을 ‘회장’이 아닌 ‘대표’로 불러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올해 시무식도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진행하면서 자신의 신년사를 담은 영상을 찍어 전 세계 임직원에게 e메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회장님들의 달라진 모습은 내부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 제고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특히 최근에는 경영 환경이 수시로 변하는 만큼 여기에 발맞추기 위해 빠르게 새로운 전략을 전파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해졌다.
김한솔 HSG 휴먼솔루션그룹 수석연구원은 “국내 대기업들은 조직을 이끄는 회장님이 회사 그 자체”라며 “리더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나 미디어에 비친 행보를 보고 회사가 중요시하는 것을 빠르게 파악해 업무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정용진 부회장만 보더라도 이번에 어려운 농가의 제품을 구매해 신세계가 이윤을 남기는 기업이지만 어려운 농민들과 함께 상생하고 있다는 일종의 ‘메시지’를 전파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이렇게 회사가 지향하는 방향을 은연중에 오픈함으로써 직원들을 일일이 불러놓고 말하지 않아도 업무의 큰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고 동시에 회사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도 제공하게 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 개선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 재계 관계자 역시 “최근 소통을 중요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기업에서 많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들과 직접 마주하고 대화하는 리더들의 행보는 애사심과 업무 의욕을 불어넣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물론 자칫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솔직한 소통이 오히려 오해와 트집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포장이 지나치면 환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만큼 이런 회장님들의 모습은 솔직함·참신함·조심성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진단했다.
김한솔 연구원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바른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다가 뒤에서 좋지 않은 행실이 드러나면 오히려 더 큰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진정성 있는 소통과 함께 자신이 한 말들을 지켜 나가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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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6호(2020.05.09 ~ 2020.05.1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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