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세계 금융에 대안 제시하는 거대한 파생상품…‘국경’ 없는 비트코인의 매력
비트코인은 화폐 주권 잃은 국민들의 ‘최후 보루’ [비트코인 A TO Z]
(사진) 블록파이의 주요 투자자인 피터 틸 페이팔 창업자./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 칼럼 =오태민 지놈체인 대표,‘비트코인, 지혜의 족보’·‘비트코인은 강했다’·‘스마트콘트랙’ 저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세계는 ‘질병으로 죽든지 불황으로 죽든지’라는 선택을 재촉 받는 모양새다. 한편 비트코인은 5월에 채굴 반감기를 거치는 데다 공공 지출의 남발로 올 하반기 강세장을 다시 맞게 될 것이란 예측에 무게가 실린다.

비트코인을 위한 ‘퍼펙트 스톰’의 전조가 레바논에서 나타났다. 레바논이 안정된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코로나19와 유가 폭락까지 덮치자 4월 한 달 동안 물가가 50%나 올랐다. 그 결과 비트코인 수요가 폭등해 레바논에서는 4월부터 이미 비트코인당 1만2000달러(약 1470만원)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가격이 춤추는 비트코인이 대안으로 부상한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장기적으로야 비트코인이 인플레이션 화폐보다 안정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 빠진 국민들이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처를 찾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비트코인을 불신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만큼 가격 변화는 장애 요소가 아니다. 레바논 같이 위기로 치닫는 경제에 속한 일반인들에게 비트코인이란 은행망을 통하지 않고 글로벌 경제권에 연결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금융 위기국에 발생하는 달러라이제이션


달러를 두고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고 비웃을 수 있겠지만 이 비웃음은 이미 달러를 방석 밑에 숨겨 놓고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제 상태에 내몰린 이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력이 부족한 때문일 뿐이다.

미국 달러가 어떤 나라의 고유 통화를 대체하는 것을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라고 한다.

달러라이제이션은 한 국가의 화폐만이 아니라 신용 시스템 전체가 불신 상태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달러 예금에 이자까지 덧붙여 달러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애초에 달러라이제이션에 빠져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달러라이제이션이란 방석 밑에 달러를 숨겨 놓고 사용할 수밖에 없는 금융 시스템 마비 상태와 연결돼 있다. 이렇게 신용 상태가 나쁜 사회에서는 중·장기적인 투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국민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 있는 일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다.

원래 브레턴우즈 체제는 민간인들과 민간 기업들의 달러 거래를 제한한다. 개별 국가의 금융망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달러 거래를 하도록 고안됐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설계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가 재정 적자를 통해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어야 유동성 함정에서 벗어나고 위기에 빠진 경제가 다시 정상화될 수 있는데 금과 같이 경직된 세계 화폐가 바로 이런 진행을 제한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라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달러가 세계 화폐의 지위를 갖기는 힘들다.

실제로 달러라이제이션은 개별 국가의 통화 정책과 화폐 발행 이익(세뇨리지)을 제한한다. 이 때문에 개별 국가로 하여금 유연한 무역 정책을 펼 수 없게 한다. 또 인플레이션을 통해 국가 채무 일부를 탕감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에 코로나19와 같은 위기가 올 때 정부 마음대로 공공 지출을 늘릴 수도 없다. 즉, 개별 정부로서도 달러라이제이션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제력이 없는 정부가 화폐를 남발하는 국가에서라면 어느새 종이 달러가 지불 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정부는 민간의 달러 사용을 차단하려고 하지만 암시장 환율과 공식 환율의 차이만 더 벌려 놓을 뿐이다. 결국 자국 화폐는 달러의 환전 수단이나 잔돈으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신용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에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정부가 마지못해 달러라이제이션을 선언하고 달러 중심으로 금융 시스템을 재편하면서 달러라이제이션이 공식화된다.

달러라이제이션이 공식화된 이후 금융 시스템만 회복돼도 달러라이제이션을 극복할 수 있다. 민간이 보유한 달러를 은행이 예금으로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에 달러를 맡기고 이자까지 얹어 달러로 돌려받을 수 있다면 방석 밑에 보관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민간이 달러를 예금하면 은행은 수입업자에게 달러를 대출할 수 있고 수입업자는 원재료나 부품을 들여와 부가 가치를 높여 수출하므로 달러를 벌어올 수 있다. 이런 선순환이 작동한다고 경제 주체들이 믿게 되면 달러 예금 증서가 화폐처럼 유통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달러에 페그된 은행권이 등장한 셈이다.

이 은행권이 민간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면 정부는 은행권을 간접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면 은행권이 본래 달러의 예금 증서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은행권 자체가 신용 수단으로 쓰이게 되고 다음 단계로 중앙은행이 은행권들을 통합하는 형태로 대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개별 화폐가 독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번 달러라이제이션에 빠져든 국가가 이 과정을 되감아 화폐 주권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자국 화폐를 휴지로 만들었던 그 사회의 고유한 질환이 단번에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가까운 나라가 달러라이제이션으로 치닫기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미국과 먼 나라의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달러를 유통한다. 북한의 장마당에서 달러가 사용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언제 화폐 개혁을 시행해 저축을 무효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달러를 사용하게 만드는 원인이므로 정부가 통제하는 은행을 믿고 달러를 맡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트코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달러라이제이션에 돌입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국경이 없는 비트코인 은행에 비트코인을 저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파이처럼 미국에 근거지를 둔 금융 회사일 수도 있고 아예 스마트 콘트랙트로 만들어진 시스템적인 계약일 수도 있다. 방석 밑에 달러를 모아 놓는 대신 비트코인 금융망을 활용한다면 달러 예금과 달러 대출을 연결해 달러라이제이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선순환이 비트코인 파생 금융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비트코인을 하나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인식하는 대신 세계 금융 시스템의 현실과 문제 상황 때문에 성장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파생 금융 상품의 중심축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다.


[돋보기] 비트코인 은행으로 성장하는 블록파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는 2018년 8월 블록파이에 암호화폐 담보 대출 서비스 면허를 내줬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을 담보로 삼아 달러를 빌려주는 단순한 금융 서비스다. 블록파이는 2017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1억 달러 넘게 투자를 받았다. 엘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페이팔을 설립했던 피터 틸과 윙클보스 형제가 설립한 윙클보스캐피털도 참여했다. 2018년 비트코인 가격의 침체기에도 이 회사의 수익은 20배나 증가했다. 블록파이가 관리하는 자산 규모는 6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최근에는 싱가포르의 트리애로캐피털에서도 투자를 유치하면서 아시아 금융 시장에도 문을 두드리고 있다.

비트코인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전당포에 가까운 이 서비스가 사실은 암호화폐 은행의 초기 형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트코인은 집이나 귀금속으로는 따라오기 어려운 균질성을 보증하므로 보관된 비트코인을 대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으로 예금해 비트코인으로 이자를 받으려는 이들과 비트코인을 빌려 비트코인으로 갚으려는 이들은 비트코인에 대해 정반대로 전망한다. 예금하는 이들은 비트코인의 달러나 다른 화폐에 대한 교환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믿는 반면 비트코인을 빌렸다가 비트코인으로 갚겠다는 이들은 가격이 떨어진다는 쪽에 베팅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엇갈린 전망과 일종의 투기적 욕망이 어우러져서 비트코인 파생 금융을 성장시키고 있다. 바로 이런 비트코인 파생 금융이 신용 위기에 빠진 경제권에 속한 국민들로 하여금 계속해 세계 중심부에 연결돼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격의 급격한 변동성이 유인하는 투기 세력 덕분에 안정된 경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하지만 달러라이제이션에 내몰리게 될 지구촌 시민들에게 이 역설이야말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76호(2020.05.09 ~ 2020.05.1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