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비선이 없으면 공식 조직에 포획…적절히 활용하면서 전횡은 차단해야

최고경영자를 위한 ‘비선(秘線)’ 사용설명서 [박찬희의 경영전략]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최고경영자(CEO)는 숙명적으로 거짓과 왜곡에 둘러싸여 있다. 제출받는 자료에는 수많은 관계자들의 암투와 거래가(만든 사람들의 주관 혹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숨어 있고 면담과 보고에도 교묘한 계산이 파고든다.

잠시 정신 줄 놓으면 순식간에 노회하고 영악한 사내 정치에 포획되고 만다. 따로 솔직하게 물어보고 일을 맡길 ‘비선(秘線)’이 있어야 이런 ‘거짓과 포획의 궁정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능한 경영자는 비선이 새로운 권세가 돼 전횡하거나 공식 조직과 결탁하지 않게 차단한다. 사람들이 비선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더욱 좋다.

◆사례1-물려받은 체제에 포획된 A 회장


A 회장은 전형적인 ‘잘 교육받은 3세 경영인’이다. 선대 회장이 타계해 급히 대권을 물려받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사업 현장의 더럽고 치사한 속사정은 잘 모른다. 선대 회장은 자식 대에는 건설판의 험한 일들과 멀리하기를 원했고 ‘가신(家臣)’들은 그 뜻을 받들어 ‘아드님’이 폼 나는 사람들과 우아한 교류를 이어 가게 판을 깔았다.

가신들의 이익과 권세를 지키고 그들이 만든 체제와 인맥에 안착시켜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의도인데 세계적 명문가에 필적하는 ‘로열패밀리’를 지향하는 모친의 허영심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A 회장은 회사 곳곳의 심란한 사정을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몰랐으니 새로 알려면 만나서 들어야 하지만 보고와 면담은 기존 가신들을 통해 관리된다.

이를 아는 직원들은 평생 얼굴 볼 일 없는 회장보다 가신들의 눈치를 본다. 가신들을 통해 A 회장에게 연결된 외부의 ‘훌륭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선대 회장의 승계 작업부터 관리해 온 가신들은 온갖 비밀을 쥐고 있고 ‘A 회장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벌이는 무리하고 위험한 일들은 그들의 권력을 더 키운다. 자칫 문제가 커지면 책임은 A 회장의 몫이 되니 가신들에게 목줄을 잡히는 셈이다.

A 회장은 마음 편히 감정 표현을 할 수도 없다. 언짢은 반응이라도 보이면 그럴듯한 해석이 더해지면서 중역들의 목이 날아간다. 이런 사실을 A 회장은 알지도 못한다. 환관의 품에서 자란 어린 황제가 궁중에서 오가는 사이에 대신들이 숙청돼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상무와 전무 이상만 수백 명이 넘는 대기업에서 CEO가 잠시 정신 줄 놓으면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A 회장이 사업의 밑바닥을 모를수록 오랜 시간 부리며(사실은 포획되며) 익숙해진 기존의 체제가 편할 수밖에 없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성이 대견할 뿐 그들의 무리와 위험이 A 회장 자신을 인질로 묶는 올가미인 줄 모른다.

A 회장은 하루빨리 회사 안팎에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짜 맞춰진 보고서와 면담에 숨은 ‘또 다른 진실’을 찾고 스스로 판단해 책임질 일을 가려낼 수 있다. 유치한 허영심을 버리고 혹시나 있을 가신들의 반발을 누를 용기만 있으면 쉬운 일이다.

◆사례2-밑바닥 정보를 모르는 B 사장


의류 업체를 창업해 중견기업으로 키운 B 사장은 세상 물정에 밝다. 또 최신 기술 동향이나 경영 이슈도 따라잡으려고 노력한다. 유통과 패션 분야의 세계적 기업들과 거래하고 공동 투자도 하면서 국제 경제 동향이나 관련 입법, 정부 정책에도 식견을 넓혀 왔다. 이런 식견을 바탕으로 경제 단체에 간여하기도 했다.

이런 B 사장은 막상 사업 현장의 밑바닥 정보에서는 멀어지고 말았다. B 사장은 창업 초창기부터 같이 일한 자재, 외주 생산, 유통 분야의 사업자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새 이들도 밑바닥 현장 일과 멀어진 ‘사장님’이 됐다. B 사장은 회사가 다루는 중저가 의류를 사고 입는 평범한 생활인들을 잘 모른다. 등산복에 이어 트레이닝복이 일상이 되고 고급 브랜드 제품의 할인 매장 가격이 중저가 신상품을 위협하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무더위에 넥타이를 매고 지하철로 출근해 쭈그리고 앉아 삼겹살 먹는 직장인이 양복바지를 절대 안 입는 사정도 알 리 없다. 해외 사업이나 정책 동향 역시 ‘한 자리’ 하는 사람들의 우아한 얘기들만 알지 실제로 도장 쥐고 비트는 사람들의 속사정은 접할 길이 없다.

B 사장이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할수록 직접 일하는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몸을 사린다. 잘못 얘기해 한심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겁을 먹기 때문이다.

20년 거래한 외주 생산 업체들이 늘 만들던 ‘아재 양복’만 고집해 신상품이 매장 구석에서 박스째 재고가 되고 있지만 뚜렷한 대책도 없이 얘기를 꺼냈다가 날벼락만 맞을까봐 숨기고 덮는다.

B 사장은 일반 대중보다 패션을 잘 알고 경제와 정책도 잘 안다. 하지만 패션을 잘 모르는 대중의 일상이 의류 시장을 만들고 B 사장과 친구들의 눈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대중의 정서가 정치를 통해 법과 제도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B 사장의 식견은 무력하다.

B 사장은 회사 안팎의 훌륭한 사람들은 물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세상을 읽어야 한다. 마음 편하게 욕하고 짜증낼 수 있는 바보 같은 질문도 할 수 있는 친구들이면 더 좋다.

수틀리면 서로 삐지다가도 단체 채팅방에서 떠들며 이를 푸는 초등학교 동창이나 낚시터 친구들은 아무 부담 없이 세상사를 얘기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세상의 변화를 읽어 사업 전략을 얻지 못하고 잘난 사람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에 허영심을 달랜다면 빨리 은퇴해 그리 살아도 표 나지 않는 ‘엉터리 교수’나 하시라.

◆사례3-비선과 공식 라인의 경계선을 지켜야


C 회장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들은 회사 직원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지인들과 따로 상의해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회사 사람들만 믿다가 그들에게 포획돼 고생한 선친의 예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C 회장의 ‘비선 측근’들이 회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개인적 일을 돕는 친구가 사장과 중역들에게 권력으로 군림하고 사업 이권을 다루는가 하면 균형을 잡아 줘야 할 지인들이 회사 사람들과 입을 맞춰 자기 정치를 한다.

사람들이 모르니까 비선이지 다들 알면 공인된 측근일 뿐이다. 비선의 전횡이 문제가 된 몇몇 스캔들도 개인적 관계가 공식 조직의 일에 개입, 권력으로 군림해 벌어졌다. 환관과 후궁이 대신들과 영합해 전장의 장군들을 휘두르는 궁정 정치의 비극도 이렇게 시작됐다.

유능한 경영자는 공식 조직과 비선의 공간을 나눠 전횡이나 영합을 차단한다. 친구의 조언이 고마우면 개인적으로 보답해야지 자리나 권세를 나누면 안 된다.

공식 라인은 책임이 따르고 조직의 여러 사연들이 발목을 잡는다. 비선은 책임과 사연에서 자유로우니 공식 라인의 빈틈을 채울 수 있다. 대형 정치 스캔들에 연루돼 수사를 받던 C 회장은 후진국 기업인으로서 권력에 시달리며 억울했던 일, 경제를 일으킨 공로 등을 변호인들과 챙기다 문득 차 심부름하는 여직원의 생각이 궁금했다.

“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라고 묻자 여직원에게서 “네. 돈 주셨으니까요”라는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C 회장은 그 여직원과 따로 얘기하며 그녀와 친구들의 소박한 생각을 듣고 공판 전략을 모두 바꿨다. 이 사실이 알려져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회사를 사직하고 공부로 새 인생을 열었고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C 회장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따로 물어보고 일 맡길 사람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래서 비선의 무책임과 전횡을 막는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봤다. 그런데 회사 조직 안에 있는 또 다른 비선, 이른바 측근과 가신은 또 어찌하면 좋을까. 추후 게재할 예정인 ‘측근 사용설명서’에서 생각해 보겠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4호(2020.07.04 ~ 2020.07.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