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트렌드]
- ‘디지털 지갑’ 클립, 이용자 경험(UX) 돋보여…블록체인 경제 생태계 설계가 중요
‘카카오의 신화’는 블록체인에서도 통할까
[심용운 SKI 딥체인지연구원 수석연구원] 몇 년째 연락이 없던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무슨 일인가 봤더니 클립(Klip)에 가입하고 50클레이(Klay)를 받으라는 가입 이벤트 메시지였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의도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도 잠깐, 그래도 보내준 배려에 감사하며 어느새 가입과 충전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현재 시세(6월 초)로 1클레이가 200원 전후니 대략 1만원 정도의 가치라 엄청난 횡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금액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바로 클립이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의 자회사인 그라운드X가 개발한 디지털 지갑(wallet)이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그리고 암호화폐 지갑의 의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지갑은 그야말로 돈을 넣고 다니는 단순한 물질적 보관 장소에 불과하다. 하지만 블록체인 세계에서 지갑은 단순히 돈을 보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미 알려졌듯이 블록체인 세상에서 네트워크 참여자는 합의 과정에 기여한 보상으로 암호화폐를 지급받는다. 이 암호화폐를 보관하고 거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갑이다. 즉, 본인 지갑의 개인 키, 공개 키 그리고 자산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일종의 은행 계좌인 셈이다.


과거 블록체인에서 지갑은 단순히 가상화폐를 전달하는 역할에만 그쳤다. 하지만 중앙 서버가 존재하지 않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작동하는 분산 애플리케이션(앱)인 댑(DApp : Decentralized Application)이 등장하면서는 그 역할의 중요도가 달라지고 있다. 블록체인과 고객을 연결하는 이용자 접점인 동시에 개별 댑을 연동하게 하는 핵심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더리움·트론·이오스 같은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작동하는 댑에는 지갑이 필수적이다.


클립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우선 긍정적인 평가는 이용자 편리성이다.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과 연계되다 보니 이용자 접점(UI)이 자연스럽고 직관적이다. 이용자 접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이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블록체인 기반의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고객은 암호화 화폐나 디지털 지갑의 뒷단(back-end)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뒷단은 앞단(front-end)에서 전달된 데이터와 서버 관리 영역일 뿐이다. 반면 앞단은 사용자의 화면에 보이는 서비스나 앱이다. 당연히 이용자에게는 편의성이 우선이다. 단순 문자 서비스에서 종합 플랫폼으로 성장한 카카오톡의 신화는 이러한 고객의 편리성에 소구한 것이 주효했다.


이런 측면에서 클립은 일반인, 즉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익숙하지 않은 이용자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돼 있다. 물론 추가적인 주소 제공이 안 돼 다른 서비스의 아이디(ID)와 연동됨에 따라 발생하는 이용자의 프라이버시 우려도 지적된다. 하지만 카톡 계정과 클립 계정이 연동돼 별다른 인증 절차 없이 6자리 비밀번호만으로 카톡 보내듯 누구나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고객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인 것은 틀림없다.


더 나아가 그라운드X는 뜻도 모를 알파벳 대소문자와 숫자가 난해하게 표기된 기존 지갑 주소를 e메일과 같이 이해하고 전달하기 쉬운 형태의 주소로 전환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카카오의 암호화폐 지갑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클립이란 지갑도 카카오의 블록체인 플랫폼 사업의 큰 퍼즐 속의 한 구성 요소다. 클립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블록체인 플랫폼인 클레이튼(Klaytn)의 암호화폐 클레이와 다른 암호화폐를 보관하기 위한 여러 지갑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카카오의 블록체인 플랫폼인 클레이튼 자체의 미래에 대해 더 세심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클레이튼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란들
실제로 클립이 이용 편의성 측면에서 진일보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넘어야 산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클레이튼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코인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 방식인 암호화폐 공개(ICO)와 관련된 것이다.


논란의 시작은 5월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지닥이 그라운드X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레이 토큰을 원화 마켓에 상장하면서부터다. 이후 데이빗과 코인원 등도 클레이 상장을 강행하면서 클레이 상장 권한과 관련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클레이튼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네트워크 블록체인인 퍼블릭 블록체인을 표방하면서 거래소 상장을 막을 수 있느냐다. 그라운드X 측은 클레이가 투자 수단이 아니라 유틸리티 토큰이고 국내 법 체계에서는 주도적으로 국내 상장을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카카오는 해외 거래소에서는 클레이를 상장했지만 국내에서는 ICO를 진행하지 않고 그 대신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프라이빗 세일만 진행했다.


이에 따라 논쟁은 클레이튼이 퍼블릭 블록체이냐로 번지는 양상이다. 블록체인은 태생적으로 탈중앙화·보안성·확장성 중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블록체인 트릴레마

(trilemma)’가 있다. 클레이튼은 그중 대표적인 탈중앙화 측면에서 과연 퍼블릭 블록체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핵심 철학이자 가치 중의 하나가 탈중앙화이다 보니 가상화폐 유통이 중앙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라운드X는 탈중앙화를 다소 희생하고 이용자 편리성과 서비스 중심으로 가려는 시도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클레이튼은 퍼블릭 블록체인과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혼합 형태인 ‘하이브리드 블록체인’을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토크노믹스 블록체인 경제 생태계 설계가 관건
포브스는 최근 블록체인 기술 시장이 2025년까지 연평균 38.4% 성장, 210억7000만 달러(약 25조6000억)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 묻지 만 투자 광풍을 일으키며 한때 2800만원이 넘었던 국내 비트코인의 개당 가격이 최근 폭락해 절반 이하인 1000만원대를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카카오 같은 기존 기업이 이미 운영 중인 서비스에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를 접목하는 리버스 ICO는 성공 확률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제 성공 사례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 최근 국회에서 암호화폐 관련 산업이 제도화(특금법 개정안)돼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됐다고는 하지만 이마저 규제 편의주의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과감한 투자와 리소스 투입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 5월 삼성전자 블록체인 기술 연구 조직이 2년 만에 해체된 것이 좋은 예다. 텔레그램도 그간 야심차게 추진한 블록체인 프로젝트 ‘톤(TON)’의 추진을 공식 포기한다고 밝혔다.


블록체인의 성공은 그 무엇보다 플랫폼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토크노믹스(Tokenomics)라는 블록체인 경제 생태계를 어떻게 잘 설계하고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블록체인 기술 자체는 데이터 저장과 관리 인프라인 데이터베이스이자 분산 원장일 뿐이다. 플랫폼 토큰의 가치는 관련 이해 당사자들이 플랫폼 위에서 얼마나 많은 성공적인 서비스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단순히 보상이라는 메커니즘만으로 성공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한때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던 스티밋도 초창기 투자자·참여자·수익 규모가 급감해 좌초 위기에 처해 있다. 블록체인에서 기존 시스템과 유기적인 연계가 잘 이뤄지도록 토크노믹스를 잘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카카오의 신화’는 블록체인에서도 통할까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4호(2020.07.04 ~ 2020.07.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