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금융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암호화폐…각국 정부의 ‘과감한 포용정책’ 시작
미국 재무부가 은행의 비트코인 수탁 서비스 허용한 이유는 [비트코인 A to Z]

[한경비즈니스 칼럼 = 오태민 지놈체인 대표,‘비트코인은 강했다’·‘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 필자는 2014년부터 6년 넘게 비트코인을 관찰하고 있다. 그동안 중요한 뉴스가 여럿 있었고 그때마다 비트코인 가격이 요동쳤다. 지난 6년 동안 가장 중요한 뉴스가 지난 7월 22일 터져 나왔다. 그 덕에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가격이 오랜만에 생기를 띠고 있지만 뉴스의 충격에 비하면 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평온한 편이다.

미국 재무부 산하 통화감독청은 연방은행들이 암호화폐의 수탁 보관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만간 뱅크오브아메리카나 씨티은행이 암호화폐 전용 창구를 개설하고 투자 포트폴리오 상담과 수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됐다.

미국 증권감독위원회(SEC)가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를 허가한다는 뉴스만큼 획기적이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지만 시장의 반응은 덤덤하다. 미국의 1차 금융회사에서 비트코인 수탁 서비스를 하게 됐다고 해도 사업성이 크지 않아 비트코인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기사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트코인 ETF의 허용도 시장성보다 전 세계 기관투자가들에게 비트코인을 투자 자산의 하나로 삼으라는 신호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기대를 모아 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관투자가들의 진출


은행이 비트코인 수탁 서비스를 한다는 사건을 미국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다. 미국은 정부보다 은행이 먼저 성업했던 나라다. 은행들은 금화 보관증의 형태로 은행권을 자유롭게 찍어내 통화를 공급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연방 정부 주도로 화폐 발행을 시작한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때가 처음이었다.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종이돈이 필요해진 것이 달러 표준화의 배경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수많은 은행권을 정리해야 했으므로 전쟁 중에 국가은행법(National Bank Act, 1863년)을 마련했다. 이 법에 따라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은행들을 관리하기 위해 둔 기구가 바로 통화감독청이다. 이름에 통화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사실 은행의 전국 영업권 인허가를 담당하고 있는 연방은행관리청이다. 통화감독청은 은행들에 금융 감독 기구 중 미국 중앙은행(Fed) 다음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편 통화감독청은 Fed와 달리 행정부에 속해 있다.

지금까지 비트코인·암호화폐와 관련해서는 SEC나 미국 선물거래위원회(CFTC)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 기관 모두 화폐와 관련이 없다. “비트코인이 화폐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통화를 관리하는 Fed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국회의원들이 Fed 의장에게 물었을 때 당시 Fed 의장은 비트코인은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은행들이 비트코인을 활용해 여신 업무를 하게 된다면 Fed나 미 재무부가 비트코인 관할 당국이 된다. 즉 암호화폐라는 새로운 영역을 놓고 벌어진 금융 기업들 간의 업권 다툼에서 중요한 교통정리가 막후에서 이뤄졌다는 신호로 해석될 만한 대목이다. 지금까지는 파생 상품을 감찰하는 기구가 비트코인의 제도권 진입 여부를 타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비트코인은 1차 금융권 은행들의 일반 창구로 진입하게 됐다.

비트코인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얼마의 보관료를 받고 금고에 보관해 주는 수동적인 서비스에 만족할 것이라는 상상력은 근거가 희박하다. 전문가를 고용한 은행들은 주로 나이 많고 돈 많은 고객들에게 암호화폐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적극적으로 제안하려고 할 것이다. 전문 지식에 근거해 관련 뉴스를 분석해 주는 투자 자문이 수반되므로 보관료도 수익에 따라 변동되는 상품이 생길 것이다. 은행들은 여러 가지 암호화폐를 포함하는 상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다.

물론 통화감독청은 고객의 암호 자산을 개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고객들의 자산을 합산해 운용할 수 없으므로 고객의 자산을 현물로 보관해야 한다. 즉 고객이 맡긴 암호화폐로 여신 업무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은행권이 다량의 암호 자산을 확보하고 나면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로비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들은 대체성이 뛰어나다. 합산과 분할이 손쉽게 이뤄진다. 상품마다 개별적인 특성을 갖는 그림이나 부동산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회계 처리가 간편하므로 집합 자산을 운용하기가 수월하다. 즉 통화감독청의 조치는 비트코인을 본원 통화로 하는 은행권 통화의 창출로 나아가게 될 긴 여정의 시작점일 수 있다. 당국이 이런 전망을 가지고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를 허용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기초적인 지식이 더 중요하다. 고객의 당좌 자산에 기초해 신용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제1금융권 은행들의 본질적 기능이다. 은행업 면허의 핵심이 바로 남이 맡긴 자산을 다른 이에게 빌려주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이자놀이를 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다.
미국 재무부가 은행의 비트코인 수탁 서비스 허용한 이유는 [비트코인 A to Z]
◆정부의 힘으론 결코 없앨 수 없는 비트코인

비트코인을 튤립 거품이나 지하 경제로만 생각해 온 이들에게는 미국 정부의 갑작스러운 선언이 난데없는 일로 다가올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트코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행정부의 정책과 관련 없이 돌출적인 해프닝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임명된 브라이언 브룩스 통화감독청장은 직전까지 미국 최대의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최고 법률 책임자로 있었다. 브룩스 청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분산 시스템 옹호자로서 블록체인이 기존의 은행망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행정부가 이런 사람을 은행들을 감독하는 기구의 책임자로 앉힐 때는 뭔가 계획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비트코인 가격을 끌어올릴 수도 있는 이런 조치에 미국 행정부가 앞장선 이유는 무엇일까.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 선택은 불가피했다고 봐야 한다. 자금 세탁 방지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비트코인을 제도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는 기존의 금융 자산과 달리 이전과 보관할 때 금융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이 정부의 손길이 미치는 보안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고 현금을 직접 주고받는 것처럼 송금할 수 있다. 제도권이 품지 않으면 음지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혁신 기술이다.

비트코인과 암호화폐가 범죄 조직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비트코인이 주류화되기 어려운 이유로 보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만이 아니라 각국 정부들의 비트코인과 관련한 첫째 목표는 비트코인과 이 기술을 사장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이 목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에 맞춰 정책 목표를 재조정할 수밖에 없다. 제도권 내에서 상당 부분을 관리하려면 과감한 포용 정책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실제로 은행들이 고객의 비트코인을 많이 확보하면 할수록 정부는 비트코인 소유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된다. 은행에 맡기지 않은 사람의 소유 현황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비트코인이 지갑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동하기 때문이다. 알려진 지갑과 거래한 지갑의 실소유자는 수사 당국이 의지만 있으면 추적할 수 있다.

페이스북보다 차라리 은행이 주도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때 이 조치는 다른 정부의 고민도 사실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또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 주고 있다. 정부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지적 탐구로나, 투자 대상으로나 비트코인을 무시하는 태도야말로 지나치게 위험하고 비싼 선택이 돼 버렸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9호(2020.08.08 ~ 2020.08.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