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 이야기-루이 비통③
호기심 많은 수집가…2차 세계대전 위기 극복하고 명품 산업 부흥 위해 발 벗고 뛰어 [한경비즈니스 칼럼=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루이 비통의 삼대를 이은 사람은 가스통 루이 비통이다. 창업자 루이 비통의 손자인 그는 1883년 태어났다. 그는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 루이 비통의 세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장 루이 비통은 병으로, 쌍둥이 형제인 피에르 루이 비통은 1차 세계대전 중 사망했다. 가스통 루이 비통이 루이 비통 발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2차 세계대전 와중에 루이 비통을 꿋꿋하게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미적 감각과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방 위주인 루이 비통의 명품 품목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했으며 제품에 섬세함을 더했다.
그가 할아버지가 창업해 아버지로 이어 온 루이 비통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4세(1897년)부터다. 2년 동안 할아버지가 공을 들여 만든 아니에르 공방에서 도제식 훈련을 받았다. 스물두 살 때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매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 현장 밑바닥부터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다. 그가 “이 일이 스포츠처럼 느껴졌다. 사실 예전부터 그렇게 느껴 왔고 앞으로도 그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일을 즐겼던 것 같다.
아버지 조르주 비통이 건장했던 데 비해 그는 허약했다. 아버지는 50세의 나이에 루이 비통 제품 중 부피가 제일 큰 워드로브 트렁크를 손목으로 들 정도였지만 그는 기관지 이상에 따른 호흡 부전으로 고생했다. 그는 “부주의한 유모 때문에 기관지염에 걸렸는데 이로 인해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기관지가 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는 징집 면제를 받았다. 이 때문에 매장 관리를 비롯한 루이 비통의 경영과 디자인 개발 등에 일찍부터 힘을 쏟을 수 있었고 회사 발전으로 이어졌다.
여행 가방에 세련미와 예술성 더한 새 스타일 선봬
가스통 루이 비통은 여행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 받은 것이다. 그는 영어를 배웠고 영국과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열정과 호기심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고 이는 루이 비통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가는 곳마다 제품이 될 만한 아이템을 눈여겨봤다. 소매 유통과 수출이 이뤄지는 방식을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 당시 새로운 휴양 방식으로 떠오른 캠핑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으며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1936년 이후 전적으로 그의 책임 아래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4년 뒤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해외 바이어들은 계약을 해지했다. 아니에르 공방에서 만든 명품들은 프랑스 내 파리·니스·비시 등 매장에도 공급할 수 없었다. 가스통 루이 비통의 아들들은 독일 치하의 나치 협력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가스통 루이 비통과 아들들은 드골 장군을 지지했고 몇 년 동안 루이 비통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이 끝난 뒤 가스통 루이 비통은 명품 산업 부흥을 위해 발 벗고 뛰었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수집가였고 이는 루이 비통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에 관심이 많아 골동품점·고가구점·경매장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동시대의 트렁크와 트렁크 제작용 연장에서부터 장인조합의 간판과 대형 호텔에서 투숙객에게 붙이는 라벨, 여행 용품에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들을 수집했다. 동시대 물건뿐만 아니라 과거의 예술품 수집에도 나섰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이 비통의 여행 가방도 변화를 맞게 된다. 이전의 루이 비통 여행 가방은 트래블 키트, 가먼트 백 등 단순한 형태였는데, 예술성이 가미됐다. 중세의 여행 가방이 미용 용품, 구강 용품을 넣어 다니는 간소하고 단순한 케이스였지만 루이 비통의 새로운 제품을 통해 세련미가 더해진 것이다.
가스통 루이 비통이 고안해 만든 여행용 가방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프랑스의 명품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1926년 영국 식민 지배 시절 집권한 인도 바로다 왕국의 마하라자 왕자가 호랑이 사냥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티 트렁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사진 참조). 소가죽의 색깔을 그대로 살렸다. 그 안에는 은도금과 자기로 만든 식기가 들어 있다. 호랑이를 사냥하러 숲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때 찻잔과 잔 받침, 차 단지, 컵, 향수병, 물병, 크림 단지, 칼, 포크, 디저트 스푼, 냅킨, 식탁보 등을 안전하게 넣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간결하고 직선적인 아르데코 양식에 빠져
1925년 열린 장식 미술과 현대 산업 박람회엔 그 시절 유행한 아르데코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행사였다. 그 이전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이 유연함·곡선·굴곡을 잘 살린 반면 아르데코는 간결하고 직선적인 선, 기하학적인 형태를 잘 나타내 준다. 가스통 루이 비통이 선보인 제품은 이런 아르데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밀라노 트래블 키트와 같이 선의 우아함과 색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걸작을 전시했다(사진 참조).
밀라노 트래블 키트는 겉은 돼지피, 안은 붉은색 가죽으로 돼 있고 덮개가 위로 열리는 함이다. 내부 구성물은 50개가 넘는다. 은도금 마개가 달린 코크 글라스 향수병이 들어 있다. 받침대에는 내용물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몇 mm 간격을 두고 섬세하게 홈을 파 그 위에 솔빗을 얹어 놓았다. 하단에는 속옷용 서랍 2개가 달려 있다. 정교하게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에 상아로 만든 브러시와 각종 미용 용품이 아르데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루이 비통의 여행 세트들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 당시 일상생활이나 여행, 삶의 수준 향상을 위한 필수품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932년 샴페인을 제조하는 한 사람이 가스통 루이 비통에게 샴페인 5병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튼튼하면서도 우아한 가방을 주문했다. 노에 백(샴페인 4병은 바로 넣고 한 병은 중간에 거꾸로 넣는 것)은 이렇게 탄생해 이제는 루이 비통의 고전이 됐다(사진 참조).
자료 협찬·사진 제공 = 루이 비통 코리아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6호(2020.12.07 ~ 2020.12.1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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