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알못 판례 읽기]

허위 서류 제출 등 적극적 기망 행위 없어…제작 관여 안 했어도 상표 인정
퇴직 후 전 직장 상표를 특허 등록했더니… 대법원, 원심 뒤집고 ‘무죄’ 판단 [법알못 판례 읽기]
[한경비즈니스 칼럼=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 이전에 근무하던 직장과 분쟁을 벌이는 중 이 회사와 비슷한 상표를 먼저 등록했다면 업무방해죄가 될까. 12월 4일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업무 방해가 아니다”고 판단한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단순히 상표를 먼저 등록했을 뿐 적극적으로 기망 행위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A 씨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박물관 사업을 운영하던 B사에서 사내이사 등으로 일했다. 그는 사측과 분쟁을 벌이다가 회사를 나오게 됐다. B사는 A 씨가 사내이사 직에서 물러난 직후 박물관을 열고 특정 상호를 사용하게 됐는데 A 씨가 B사에 앞서 해당 상호를 먼저 특허청에 등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검찰은 A 씨가 B사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했다.


A 씨가 상호를 먼저 출원한 행위가 과연 위계를 사용해 업무를 방해한 것인지를 두고 1·2심과 대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렸다.


퇴사한 회사 상표 등록…1·2심 “유죄”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2014년 이전에 자신이 근무했던 B사의 상호를 특허 등록해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는 사내이사직을 유지할 당시 B사로부터 1억6000만원을 지급받는 대신 이 회사에 대한 가압류 등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합의한 적이 있다. 이후 A 씨는 이 같은 합의가 사기적 방법에 의한 것이고 사내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게 부당하다고 생각해 B사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A 씨의 퇴사 후 수개월 뒤 박물관을 연 B사는 한 디자인 업체에 의뢰해 서비스표를 제작하고 박물관 출입구에 이 상호를 게시하는 등 공개적으로 사용해 왔다. A 씨는 B사가 사용하던 상표를 먼저 등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B사와 관련된 로고와 상호 등을 특허청에 서비스표로 등록했다.


1심은 A 씨가 유죄라고 봤다. 1심 재판부는 “당시 A 씨는 이미 B사의 이사직을 모두 사임한 상태였고 상표 제작이나 사용에 관여한 적이 없다”며 “상표를 사용하고자 하는 B사로서는 법인의 신용과 소비자의 신뢰 등을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판시했다.


상표·서비스표의 등록 단계에서는 실제로 그 상표나 서비스표를 사용할지 여부를 실질적으로 심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A 씨는 실제 사용할 마음이 없었음에도 서비스표를 등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상표와 서비스표를 실질적으로 사용하고자 한 B사로서는 이와 관련한 법인의 신용과 소비자의 신뢰 등을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2심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2심 재판부는 “A 씨가 그 제작에 관여하지 않은 B사의 서비스표 등을 특허청 담당 공무원의 부지(不知)를 이용해 먼저 출원해 등록함으로써 B사가 서비스표 등을 사용하는 데 지장이 초래될 수 있게 만든 것은 위계(僞計)로 인한 업무 방해 행위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며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에서 바뀐 판단…“업무방해죄 아냐”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 재판부는 B사와의 소송 중 A 씨가 먼저 상표를 등록했다는 사실만으로 업무 방해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A 씨가 상표를 출원하면서 ‘위계’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본 것이다.


재판부는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에서 위계는 행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오인·착각 또는 부지를 일으키게 해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A 씨가 B사보다 상표와 서비스를 먼저 출원했다거나 제작에 관여하지 않았으면서 출원했다는 사정만으로는 B사에 대한 위계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A 씨가 상표 등록 과정에서 허위 서류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기망 행위를 한 적 없다고도 지적했다. 특허청 심사관이 이 상표를 등록하는 과정에서 사실을 잘못 알도록 하거나 알아야 할 사실을 모르게 해서 이를 이용한 점이 없다는 점도 짚었다.


2016년 2월 개정되기 전인 구 상표법 역시 판결의 근거로 들었다. 대법 재판부는 “구 상표법에 따르면 상표권은 설정 등록에 의해 발생한다”며 “국내에서 상표를 사용하는 자 또는 사용하려는 자는 자기의 상표를 등록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상표를 사용한 사실이 있거나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여부는 상표권 발생의 요건으로 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더해 A 씨의 경력이나 해당 상호가 사용된 업종의 특성에 비춰볼 때 A 씨가 이 서비스표를 국내에서 사용하려는 의사 없이 이 사건의 서비스표를 출원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도 봤다. 이에 재판부는 “원심 판결에는 업무방해죄에서의 위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원심의 판결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돋보기

상표 등록은 선착순?…특허청 “가로채기 모방은 안 돼”


‘누가 원조냐’를 두고 다투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상표권 침해 소송 등 법적 분쟁으로도 번지기 일쑤다. 이 같은 분쟁은 외식업계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지난 10월 한 TV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해진 포항의 ‘덮죽’ 전문점 상표를 제삼자가 출원해 논란을 빚은 게 대표적이다. 상품이나 서비스와 관련 없는 사람이 등장해 ‘원조’의 권리를 빼앗아간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한국의 상표법은 선(先)출원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무조건 먼저 출원한 사람이 상표를 등록받는 것은 아니다. 제삼자의 행위가 가로채기나 모방이라는 판정이 나오면 상표를 등록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현행 상표법은 특정인의 출처 표시로 인식된 상표를 타인이 먼저 출원했다고 하더라도 상표법 제34조 제1항 제12호(수요자 기만)나 제13호(부정 목적 출원) 등에 의해 등록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만약 본인이 사용하고 있는 상호 등을 제삼자가 무단으로 출원한 사실을 알게 됐다면 그 상표가 등록되기 전에는 정보 제공과 이의 신청을 할 수 있고 상표 등록 후에는 무효 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또 상표법은 ‘소상공인 등을 위한 성명·상호 등의 선사용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본인이 먼저 사용하고 있는 상호 등을 타인이 먼저 동일·유사한 상품에 상표 등록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등록의 무효를 선언 받기 위한 심판 청구 여부와 상관없이 부정 경쟁의 목적이 없다면 간판을 내리지 않고 계속 영업에 사용할 수 있다.


성명·상호·메뉴명 등이 널리 알려진 상태이고 자신의 영업 행위를 다른 업체와 구분되는 수단이 됐다면 상표를 등록하지 않았더라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다. 법원에 사용 금지 및 손해 배상을 청구하거나 특허청 행정 조사를 통한 구제도 가능하다.


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은 빠르게 상표를 등록하는 것이다. 개인 사업자 등 소상공인은 사업 구상 단계에서부터 미리 상표를 출원하고 등록받아야 상표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7호(2020.12.14 ~ 2020.12.2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