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불러 줄 때를 기다리며 은거한 강태공·제갈량은 ‘가은사(假隱士)’

속세 떠난 ‘은사’…그들이 숨은 진짜 이유
시인 조지훈은 그의 시 ‘낙화(落花)’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물론 근대 이전의 왕조 사회에서 자연에 파묻혀 은일하던 시대의 거사나 처사는 아니었지만 자연을 노래하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속세와 일정한 거리를 둔 시인의 청순하고 담백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공 세우고 홀연히 사라진 맹절
전란으로 날이 새고 전란으로 날이 지던 난세의 ‘삼국지’ 시대…. 전국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영웅호걸들이 천하를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혼란의 시대…. “들판에는 백골뿐, 천리를 가도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네!” 조조가 그의 시 ‘호리행(蒿里行)’에서 노래한 것처럼 지긋지긋한 난리 통에 속세를 떠나 산간에 숨어든 사람은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은사(隱士)라고 부른다. 대개 은사들은 깊은 산속 맑은 물가에 둥지를 틀고 숨어 지냈다. 그들은 부귀영화를 한낱 뜬구름처럼 여기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초탈한 자세로 자연과 벗하며 노니는 고고한 삶을 지향했다.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입신양명을 추구하던 출세 지향의 유교적 전통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들이 모두 다 백학처럼 지고지순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학자 이쓰위는 은사를 3가지로 분류한다. 진은사·가은사·반은사가 그것이다.
진은사(眞隱士)는 문자 그대로 진정한 은사를 말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부귀와 명리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벽·오지에 숨어들어 아예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은 게 많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러 나섰을 때 제갈량을 도운 진은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맹절이었다. 그는 사실 남만의 수령 맹획의 친형이다. 동생 맹획이 남만을 통치하며 세속 정치의 한복판에서 제갈량의 대군에 맞서기까지 한데 비해 그의 형 맹절은 오히려 제갈량을 도왔다.
고온다습한 남만의 기후와 맹획의 게릴라 작전에 쩔쩔매던 제갈량의 군대는 맹절의 자문으로 무난히 맹획을 복종시킬 수 있었다. 제갈량이 그의 공적을 높이 사 후주 유선에게 “맹절에게 왕의 자리를 하사해 주시옵소서”라고 주청했지만 맹절은 끝내 고사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가은사(假隱士)는 나라에서 자신을 불러 줄 때까지 조용히 시골에서 숨어 지내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 공신이었던 강태공이 대표적이다. ‘삼국지’ 시대에는 유비의 참모 중 가은사가 많다. 제갈량·서서·방통이 가은사에 속한다. 후주 유선에게 바친 제갈량의 ‘출사표’에 가은사로서의 공명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신은 본래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황제(유비)께옵서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 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친히 초려를 찾아오셔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신은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반은사(半隱士)는 예전에 벼슬자리를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물러나 은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부분의 은사들이 반은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하라”는 공자의 이 말이 반은사들의 인생관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반은사’ 최치원 덕에 유명해진 화개
은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제후나 황제의 장수나 참모가 돼 정책을 수행할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관직을 고사하거나 정치에 염증을 느껴 모든 걸 내려놓고 귀향하는 경우라야 한다. 그냥 일반 백성들이 생계를 위해 혹은 세속에 염증을 느껴 귀향한다거나 깊은 곳에 은거한다고 해서 은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귀거래사’를 읊고 낙향한 도연명이 대표적인 반은사다.
“자 돌아가자! 고향의 논밭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버리자 절망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정극인도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인정받는 ‘상춘곡(賞春曲)’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속세 사람들아!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처럼 산림에 묻혀 사는 이의 지극한 풍류와 즐거움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오?”
소설 ‘삼국지’에서 반은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삼국지’ 초반부의 유비다. 동탁은 유비 3형제가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한미한 의용군 출신이라면서 제대로 전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비는 겨우 작은 시골의 현령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독우라는 감독관이 감사를 한다고 나타나서 뇌물을 요구한다. 장비가 주동이 돼 독우를 흠씬 두들겨 팬 유비 3형제는 독우에게 관인과 인수를 걸어주고는 낙향해 버린다.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중국에서 벼슬을 하다가 귀국해 신라에서 활동하던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리산으로 은거한다. 당시 최치원이 남긴 시가 ‘호중별천(壺中別天)’이다. 그런데 2015년 초 서울에서 열린 ‘중국 방문의 해’ 행사에 시진핑 주석이 최치원의 이 시를 인용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동방의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 별천지처럼 아름답다네.”
여기서 화개동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일대를 말한다. 물론 시 주석은 중한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어쨌든 최치원이 반은사로 은거했던 하동 지방을 중국 주석이 직접 언급하는 바람에 하동군이 중국인들에 의한 관광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족. 요즘 3포 세대, 7포 세대 등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구직난이 극에 달하면서 이들은 한국을 ‘헬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공서든 사기업이든 뭔가 반듯한 직업이라도 가져보고 기본적인 생계라도 해결하고 숱한 경험을 해 본 뒤에야 새로운 일을 도모한다든가 ‘세상에 염증을 느껴’ 귀향한다든가 은거하는 모습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아예 최초의 직업을 가져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이런 비통하고 참담한 상황이 하루속히 개선되기를 갈망한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