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미국 따돌린 일본, 세계 1위 중국 슈퍼컴도 핵심 부품은 미국에 의존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이하 슈퍼컴)를 보유한 나라는 어디일까. 이 질문의 의미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자존심 대결에 그치지 않는다. 슈퍼컴은 국가 안보, 경제 발전, 국민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 광범위하게 활용돼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주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계산에서 이겨야 한다(in order to out-compete, you have to out-compute)’는 말까지 있을까.
이 분야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 500대의 정보를 정리한 톱 500 목록이 유용하다. 슈퍼컴을 운영하는 기관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성능을 측정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면 톱 500 위원회가 이를 검증해 순위를 결정한다.
현재 순위는 중국의 톈허 2호가 세계 1위, 미국 최고 슈퍼컴 타이탄이 2위, 일본 최고 슈퍼컴 K-컴퓨터가 4위, 유럽 최고 슈퍼컴 피즈 데인트(Piz Daint)가 6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슈퍼컴퓨팅본부의 타키온2가 258위를 차지했다.
톱 500 목록은 1993년에 시작돼 이미 20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 한 해 두 번(6월, 11월) 발표되며 지난 6월 발표된 것이 마흔다섯째 목록이다. 그동안 축적된 데이터는 슈퍼컴에 관련된 기술 및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은 항상 전체의 절반에 근접하는 시스템을 보유,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슈퍼컴을 보유했던 나라는 미국·일본·중국밖에 없고 미국은 45회 목록 중에서 26회, 일본은 13회, 중국은 6회 1위를 차지했다.

전통의 강호 미국…엎치락뒤치락
기간을 나눠 자세히 살펴보자. 1993년부터 2001년까지는 미국이 독보적인 우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추격하는 모습이었다. 일본은 한때 전체 23%에 해당하는 115개 시스템을 보유하며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 기간 미국은 12번, 일본은 6번 세계 1위 슈퍼컴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기간의 대표적 컴퓨터는 최고의 자리를 7번 차지한 ASCI 레드(Red) 시스템이다. 인텔이 제작한 이 컴퓨터는 슈퍼컴 전용의 벡터형 중앙처리장치(CPU)를 사용하지 않고 많은 수의 범용 CPU를 이용해 구축했다. 즉 6000개의 펜티엄 프로 CPU를 채택한 병렬형 구조로 세계 최초 테라FLOPS(1초에 1조 번의 연산 수행)의 벽을 넘은 시스템이다.
2002년 슈퍼컴 분야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이 개발한 어스 시뮬레이터(Earth Simulator) 슈퍼컴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5회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전에도 일본 시스템이 1위를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왕자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대표적 기업 NEC가 제작한 이 컴퓨터는 대기와 해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종합해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데 활용됐다. 이 시스템은 5120개의 벡터형 CPU를 탑재, 2위 슈퍼컴 ASCI 화이트e의 거의 5배에 달하는 36테라FLOPS의 성능을 자랑했다.
어스 시뮬레이터는 미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줬다. 심지어 이를 구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 미국이 받은 충격에 비유, ‘컴퓨테니크(Computenik)’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자국의 슈퍼컴퓨터 정책에 대해 전반적으로 재검토,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우선 1991년 제정돼 미국이 컴퓨터 및 네트워크 분야를 세계적으로 선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고성능컴퓨팅법’을 시대에 맞게 보완했다. 즉 에너지부를 중심으로 슈퍼컴퓨팅 생태계를 혁신하려는 ‘고성능컴퓨팅부흥법’을 2004년 제정했다.
이를 근거로 백악관의 과학기술정책실(OSTP)이 주도, 에너지부·국방부·과학재단 등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를 발족하고 ‘국가 슈퍼컴퓨팅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는 슈퍼컴의 제작 및 활용 기술 개발 외에 효율적인 국가 슈퍼컴 공동 활용 체계의 설립이 포함됐고 이의 구현에 필요한 예산은 26억 달러(약 2조7900억 원)로 추정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시 슈퍼컴 분야를 세계적으로 선도하게 됐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어스 시뮬레이터는 슈퍼컴 분야에서 일본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부동의 2위를 유지하던 일본의 슈퍼컴 보유는 이후 계속 감소해 2009년에는 전체의 3%인 15대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미 흐름이 지난 벡터형 컴퓨터에 집착한 것도 크다. 초기 슈퍼컴은 전용 CPU를 이용해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CPU 개발에 필요한 비용이 계속 늘어나게 됐다. 그 해결책으로 많은 수의 일반 CPU를 탑재한 병렬형 컴퓨터가 나와 주류가 됐지만 일본의 기업들은 기존 형태에 집착하며 변신하지 못했다.
이렇게 유지되던 미국의 우위는 2010년에 중국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도전자를 만나게 됐다. 중국은 1만4336개의 인텔 CPU와 7168개의 엔비디아(Nvidia) GPU를 탑재한 톈허 1A호로 세계 1위의 자리를 최초로 차지했다. 비록 일본 K-컴퓨터에 바로 왕좌를 내줬지만 이는 중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국은 2013년 톈허 2호 슈퍼컴으로 다시 세계 1위 자리에 복귀했다. 이 시스템은 3만2000개의 인텔 CPU와 4만8000개의 인텔 Phi 가속기를 사용하며 720㎡(218평)의 공간과 17.5메가와트의 전력을 요구하는 막대한 규모다. 그 성능은 34페타FLOPS(1초에 3.4경 번 연산 수행)로 미국 최고 슈퍼컴 타이탄의 2배에 달한다.

중국 선두지만 독자 기술 부족
톈허 2호는 현재까지 세계 최고의 슈퍼컴으로 군림하고 있고 중국은 10%가 넘는 시스템을 보유하며 확고한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미국과 함께 G2 슈퍼컴 국가로 분류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된다.
냉전 시대에 서방국가들은 첨단 기술의 공산권 유출을 막기 위해 대공산권수출통제체제(COCOM : Coordinating Committee for Multilateral Export Controls)를 운영, 전략물자의 수출을 통제했다. 따라서 중국은 슈퍼컴의 모든 주요 부품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COCOM이 1996년 해제되고 중국의 개방정책이 효과를 내면서 중국에 대한 전략물자의 수출 제재가 상당히 완화됐다.
이러한 흐름에서 중국의 슈퍼컴 개발은 모든 부품을 독자 개발하는 것에서 CPU 등 주요 부품을 외산을 활용해 대규모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수정됐다.
인텔 CPU를 기반으로 1995년에 구축된 2기가FLOPS 성능의 도닝(Dawning) 1000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AMD CPU에 기반을 둔 11테라FLOPS 성능의 도닝 4000이 구축돼 중국 최초로 세계 10위에 도달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현재 톈허 슈퍼컴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현재 중국 슈퍼컴 개발의 최대 약점은 독자적인 핵심 기술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하드웨어를 보면 CPU·그래픽처리장치(GPU) 등 주요 부품을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톈허 2호를 보면 독자 개발한 하드웨어는 계산 노드를 연결하는 내부 연결망과 슈퍼컴 운영에 사용되는 CPU 정도다. 이런 상황을 ‘미국에서 제작하고 중국에서 조립한다(Made in U.S.A., Assembled in China)’라고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국도 독자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CPU를 살펴보면 MIPS 아키텍처를 채용한 갓선(Godson) CPU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2002년 갓선-1을 발표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개량한 8코어 CPU인 갓선-3C를 2011년 발표했다. 또한 알파(Alpha) 아키텍처를 채용한 센웨이(Shenwei) CPU를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로 중국이 명실상부한 제2의 슈퍼컴 강국으로 자리 잡고 더 나아가 최고 슈퍼컴 기술을 가진 미국을 넘볼 수 있을까. 최근 회복세인 일본이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도전에 미국은 어떤 전략으로 선두의 자리를 지키려고 할까. 이 치열한 싸움의 결론은 2020년 초에는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1초에 3.4경’…미중일의 슈퍼컴 전쟁
이지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