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로 줄도산 위기, 살아남은 빅 3는 시중은행 위협하며 제2 전성기

‘1호 고객’ 박정희…지방은행의 ‘인생 역전’
“이대로 가면 외환은행의 순이익이 부산은행에 역전당할 수 있다. 외환은행이 부산은행에 비해 직원은 2배가 많고 자산은 3배가 많다.”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지난 2월 기자들과 만나 한 말이다. 당시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의 합병을 위한 노동조합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은 외환은행의 부진뿐만 아니라 지방은행의 약진을 환기하기도 했다. 발언을 뒤집어 보면 직원은 절반, 자산은 3분의 1인 지방은행이 시중은행을 위협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지방은행의 역사는 어땠을까.

지방은행들은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처음 탄생했다. 정부는 1960년대 자본 부족이 계속되고 투자가 한계에 이르자 금리 인상으로 저축을 유도했다. 지방은행은 이 과정에서 지역의 자원(자본)을 최대한 그러모으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1월 지방은행의 설립 추진 의사를 밝히자 각 지역의 민간단체들도 설립에 나섰다.

맨 처음 대구은행이 설립을 신청했고 부산은행이 뒤를 이었다. 그해 말 대구은행과 부산은행이 연이어 설립되자 1968년에는 대전의 충청은행, 광주의 광주은행이 각각 세워졌다. 이에 고무된 다른 지역에서도 지방은행 설립이 계속 이어졌다. 1969년에 제주은행·인천은행(1972년 경기은행으로 개명)·전북은행이 생겨났고 1970년에는 강원은행·경남은행이 탄생했다. 이어 1971년 충북은행이 설립되면서 ‘부산직할시’에 한 곳, 나머지 1도에 1은행씩 지방은행 10곳이 설립된다. 1989년 설립돼 1998년에 퇴출된 대동은행과 동남은행은 대구와 부산에 본점이 있었지만 지방은행으로 분류되지 않던 시중은행이었다.

대구은행의 첫 거래 고객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남일동 본점에 문을 연 대구은행은 박정희 대통령을 첫 고객으로 받았다. 정기예금 10만 원.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이듬해인 1968년 충청은행과 광주은행이 설립될 때도 정기예금 통장 1호는 박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지방은행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는 얘기다.

10개 지방은행 체제는 1997년 말까지 계속됐다. 순항하는 듯했던 지방은행 체제를 무너뜨린 건 역시 외환 위기였다. 당시 지방은행들은 지역 기업이나 대주주에게 담보도 제대로 잡지 않고 대출해 주는 등 경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충청은행의 한화그룹 부실 대출이 대표적인 예다. 퇴출 당시 충청은행은 자산 3조7701억 원, 부채 3조9410억 원으로 부채가 자산보다 1709억 원이나 더 많았다. 경기은행은 자산 7조2395억 원, 부채 7조3626억 원으로 순자산이 1231억 원이었다. 전체 대출 대비 연체 대출 비율은 각각 36.3%, 49%에 달했고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퇴출 기준인 8%에 크게 못 미치는 마이너스 5.97%, 마이너스 9.61%였다. 제조 기업도 아닌 돈을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게 주 업무인 은행의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퇴출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긴 당시 비교적 건전한 은행으로 꼽혔던 은행들의 BIS 비율이 1~4%에 불과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국가적 위기였다.


외환 위기로 지방은행 판도 개편
이 와중에서 퇴출을 피하기 위한 정치권 로비가 심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충청은행은 정권의 정치적 고려를 기대하며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고 한다. 당시 정권은 자유민주연합과의 연대, 이른바 DJP연대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였다. 자유민주연합의 정치적 요구를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충청은행은 금융감독위원회의 은행 실태 평가 때 자유민주연합 국회의원을 대동하고 올 정도였다. 그 의원이 “지역은행인 충청은행은 꼭 살려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비가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치적 고려로 특정 은행을 살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는 과언이 아니었다. 외환 위기 이후 부실 지방은행들은 시차를 두고 시중은행들에 흡수된다. 충청은행은 하나은행에, 경기은행은 한미은행에, 충북·강원은행은 조흥은행에 합병된 것이다. 퇴출을 피한 나머지 은행들도 상황이 좋아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인력 감축이 이어졌다. 대구은행은 직원의 8.2%인 190여 명을 내보냈고 전북은행도 약 750명 중 8~10%의 인력을 감축했다. 점포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부산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산은행의 BIS 비율은 7%대였다.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부산은행의 부실 자산을 처리하는 업무를 맡은 것이 현재의 성세환 BNK금융지주회장 겸 부산은행장이다. 당시 단기로 외화자금을 빌려 장기 대출을 해줘 부실을 키웠던 자회사 부산리스를 정리하는 업무였다. 결국 부산리스를 떼어내고 전체 인력 약 2000명 중 10%를 내보내 BIS 비율 8% 이상을 만든 부산은행은 퇴출을 모면하게 된다. 지금 부산은행이 시중은행들을 위협하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생존과 죽음의 경계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지방은행의 2차 조정은 2001년이었다. 광주은행과 경남은행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 보유하고 있던 정부는 이 두 은행을 한빛·평화은행과 묶어 새로 신설되는 금융지주회사에 편입한다고 발표했다. 우리금융지주의 탄생이었다. 당시의 논리는 은행 간 합병이 본격화된 세계 금융 흐름에 맞춰 한국도 대형 은행을 육성해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금융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네 은행을 합치면 2000년 당시 기준으로 총자산 약 104조4000억 원의 세계 84위 금융사가 될 수 있었다. 제주은행 또한 2001년 신한은행에 합병돼 신한금융지주가 출범한다. 다만 이 시기에는 금융지주회사로 편입되는 것일 뿐 광주·경남·제주은행의 이름과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지방은행은 부산·대구·경남·광주·전북·제주 등 6개 은행 체제로 10여 년을 이어 갔다. 이 중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도 인수·합병(M&A)과 편입을 거치지 않고 최초의 독립성을 유지한 곳은 부산은행·대구은행·전북은행이다. 이들은 시중은행들의 금융지주사 설립에 발맞춰 각기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2011년 부산은행은 BS금융지주(현 BNK금융지주)를 세웠고 같은 해 대구은행은 DGB금융지주를 설립한다. 전북은행은 2013년 JB금융을 세운다.

2000년대는 한국 은행권의 ‘호시절’이었다. 일부 시중은행들은 한 해에 1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올렸다. 이때 축적한 자본과 지역 고객들의 한결같은 충성도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 지방은행은 피인수나 퇴출을 걱정해야 했던 10여 년 전 모습에서 벗어나 다른 은행을 노리는 M&A 후보자로 변신한다.

지방은행의 3차 조정은 우리금융지주의 민영화 시도로 광주·경남은행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면서 시작됐다. 12년 만에 민영화를 통해 진정한 지방은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두 은행, 특히 경남과 울산의 산업 기반을 끼고 있는 경남은행은 ‘알짜배기’라는 평가가 많았다. 자연히 노리는 자본도 많았다. 경남은행 본입찰에는 경남 지역 상공인들이 만든 컨소시엄에 DGB금융·MBK파트너스가 투자자로 참여한 경은사랑컨소시엄·IBK기업은행·BS금융지주 등 3곳이 참여했고 광주은행 본입찰에는 신한금융지주·JB금융지주·BS금융지주 등 3곳이 뛰어들었다.

경남은행 인수는 2파전이었다. IBK기업은행은 정부가 소유하고 있어 12년간 정부 소유였던 경남은행을 가져가긴 어려웠다. 처음엔 경은사랑컨소시엄이 우세했다. 경남·울산 지역 상공인과 경남은행 우리사주조합이 참여한 터라 경남은행을 지역으로 돌려달라는 논리가 먹혔다.
‘1호 고객’ 박정희…지방은행의 ‘인생 역전’
그러나 BS금융이 역전극을 벌였다. 1조2000억 원을 써내 1조 원 안팎의 가격을 제출한 다른 두 곳을 가격에서 제쳤다. “최고가 응찰자를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할 것”이라는 게 금융 당국의 방침이었다.

경은사랑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경은사랑과 손잡은 MBK파트너스가 은행법상 비금융 주력자(산업자본) 관련 규제에 걸려 인수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2013년 12월 31일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경남은행 매각을 위한 우선 협상 대상자로 BS금융을 선정한다. 그리고 BS금융은 조세특례제한법 이슈 등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0월 금융 당국의 승인을 받고 경남은행을 자회사로 편입시킨다. 광주은행은 JB금융의 품으로 돌아갔다. 약 5000억 원을 써내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BS금융과 JB금융이 각각 경남·광주은행을 인수했지만 지역적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지방은행은 지역적 자존심과 지역 고객들의 ‘충성심’으로 업력(業歷)을 이어 온 곳이다. 이웃에 피인수되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당장 경은사랑이 반발했고 경남은행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준비했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경남은행과의 도금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광주은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보다 덩치가 작은 전북은행에 인수되는 데 반발했다. 화학적 통합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우려가 나왔다.

성세환 BNK금융 회장과 김한 JB금융 회장의 진정성 있는 설득이 주효했다. 두 사람 모두 경남·광주은행을 ‘투 뱅크(two bank) 체제’로 이어 가겠다고 약속했고 노동조합과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됐다. 김 회장은 광주은행장을 겸임하며 조직을 추슬렀다. 성 회장은 경남은행 노조가 원한 ‘위로금’의 두 배를 전달했다. “12년간 ‘남의집살이’ 하느라 고생했다”는 진정성을 보인 것이다. 이 같은 신뢰를 쌓은 덕분에 성 회장은 지난 6월 24일 경남은행 지분을 100% 인수하며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지방은행 ‘전국구 도약’ 성공할까
올해는 지방은행의 역사 약 50년간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BNK금융은 올해 1분기 약 2000억 원에 가까운 순이익(1934억 원)을 올렸다. 또 지방은행 최초로 자산 100조 원을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5대 금융지주사로 자리매김했다. DGB금융 또한 1분기 순이익만 1000억 원(907억 원)에 근접했고 자산 운용사와 증권사 등 성장을 위한 또 다른 M&A 대상을 물색 중이다. 실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계 시중은행 중 한 곳을 인수한다는 소문도 나돈다. JB금융 또한 광주은행의 경남기업 대손충당금에도 불구하고 213억 원의 1분기 순이익을 올리며 선방했다. 수도권 진출을 통해 호남의 지역적 한계를 돌파한다는 각오다.

지방은행들의 든든한 기반은 무엇보다 지역 고객들의 강한 충성심이다. 이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돼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시중은행에 비해 큰 이점으로 꼽힌다. 이제 지방은행들은 자의든 타의든 ‘전국구’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계의 ‘지방 호족’들의 야심은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지방은행들은 그 야심을 성공으로 매듭지을 수 있을까.


박한신 한국경제 금융부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