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던져 놓기’식 권장 도서 선정…정작 대학교수도 읽지 않아

중고생만 괴롭히는 ‘고전 100선’
많은 대학에서 ‘고전 100선’ 혹은 ‘고전 200선’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걸 누가 읽을까. 분명 읽어야 할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아무도 그 목록에 관심이 없다. 더더구나 당사자인 대학생들은 그런 목록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하다. 왜 그럴까.

교수들은 요즘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교양의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환경과 상황이 다른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예전에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창고가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고서는 지식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책 말고도 많은 정보 채널들이 널렸다. 그런 환경의 학생들에게는 아무도 읽지 않는 ‘부독(不讀) 목록’일 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고전 시리즈 때문에 고생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중고등학생들이다. 교수도 대학생도 읽지 않는 책을 중고등학생들이 우울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혹시라도 논술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부담감을 갖고 읽는 것이다.

고전은 자조와 냉소로 정의돼 버린다. 그리고 엉뚱하게 어린 중고등학생들만 ‘고전(古典)’ 때문에 ‘고전(苦戰)’하고 있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지침 필요
왜 그런 일이 흔한 일이 되고 있는지 먼저 따지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면 서양의 대학에서 내거는 고전 100선 등의 프로그램이 성가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모범은 1928년 시카고대 총장에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가 제창했고 후임자인 몰트머 아들러가 확장시킨 ‘고전 100권 읽기 운동(The Great Book Program)’일 것이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대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을 발견하고 고전을 통해 인생에 찾아오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고전 100권 읽기 운동은 시카고대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모범적인 사례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서양에서 유학했던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 분석과 대안 모색에는 무관심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건 자기네들이 그 유익함을 경험했으면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그 유익함을 경험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카고대의 고전 100권이나 하버드 클래식처럼 필독 고전 프로그램이 성공하는 까닭은 그 어느 전공을 선택하건 대학의 수업 중 그 책들이 수시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사 수업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언급되면서 그의 경제 철학을 다루고 물리학 수업에서 선과 면과 부피의 비율을 다루면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예로 등장한다. 그러니 그 책들을 틈날 때마다 읽어 두면 그야말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영양소가 되는 셈이다. 대학 생활 동안 어떤 과목에서건 그 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학생들로서는 안 읽으려야 안 읽을 수 없다. 당연히 그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밖에 없고 수업의 내용도 훨씬 다양하고 다이내믹해진다. 그게 한국 대학들의 ‘툭 던져 놓은’ 고전 시리즈와 다른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냥 시대사만 다룬 역사 수업보다 ‘국부론’을 통해 본 시대의 역사를 검토하고 느끼는 수업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그리고 이런 훈련이 습득된 졸업생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다양하게 그 경험을 이어 가면서 보다 많은 가치들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지금은 계급이 타파된 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상류사회는 이른바 명문 학교 출신들로 채워진다. 그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그런 고전들이 계속해 인용되고 대화의 소재로 사용되거나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등 그것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적 우월성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그런 고전 100선 유의 독서물이 이미 철저하게 실용인 셈이다.

이게 고전 읽기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그 가이드를 따르면 대학 생활이 가벼워지고 사회에 나가서도 득이 된다는 걸 깨닫기 때문에 스스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말 그 성과를 기대한다면 대학교수들이 생색내듯이 근사한 책을 골라 그냥 툭 던지는 게 아니라 교수들 자신이 그 목록 전체를 읽어 봐야 한다. 교수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록 전체 읽어 본 사람은 솔직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교수들부터 작심하고 먼저 읽어야 한다. 그 목록을 위한 독회와 관련 분야에 대한 의견 교환과 상호간 지식 전수도 필요하다. 다른 전공 교수들과 그 고전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결 고리를 찾는 데 도움을 얻는다. 교수 연수는 그런 걸 위해서 하는 게 낫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자기 수업에서 어느 부분을 어떻게 인용하거나 응용할 수 있을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능수능란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선결 과제다. 정작 자신들은 읽지 않으면서 그저 목록만 만들어 내고 수업 시간에 아무런 언급도, 인용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교양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타성부터 깨야 한다. 그런 진지한 고민과 반성 없이 서구 대학의 고전 시리즈의 훌륭한 점만 떠들어 대는 한 백년하청이다.


CEO 인문학의 허상
대학의 고전 시리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또한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수업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모든 교사는 최소한 모든 교과서를 필히 읽어야 한다. 음악 교사가 음악 과목 이외의 교과서를 통해 해당 음악 교과과정에서 언급하거나 심화할 수 있는 내용을 검토하고 연구하면 노래를 부르고 이론을 배우는 데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통합 교육은 이처럼 뜻밖에 간단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어 교사는 영어 교과서만 읽고 지리 교사는 지리 교과서만 연구한다. 그러면서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고 연수와 교육에 있는 시간을 쪼개고 없는 시간을 짜낸다.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게 마련할 수 있다. 교무실 옆에 교사 연구실이나 교사 도서실을 따로 만들어 모든 교과서와 다양한 책을 읽고 서로의 관심사나 전공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 줘도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교사 도서실이나 토론방을 만들어 주는 그런 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라. 그런 자각이 선행돼야 한다.

교양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것이 왜 지금 새삼스럽게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조명되고 관심을 기울이게 됐는지 먼저 반성적으로 고찰하되 이런 전제 조건들에 대해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런 반성과 실천이 없는 한 고전 100선 아니라 500선인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기업에서 신입 사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한다고 한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인문학과 출신을 뽑지 않으면서 공대와 상대 출신들에게 엉뚱한 짐만 지우는 꼴이다. 한동안 ‘시 읽는 CEO’, ‘그림 읽는 CEO’ 등의 시리즈가 유행했다. 물어보자. ‘시를 읽었기 때문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과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 폼 잡고 교양을 과시하려고 시를 읽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당위와 모델을 보여줄 수 있어야 그런 책이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기업이 진지한 기업 철학을 먼저 설정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 사원들에게 인문학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애먼 사원들만 족치는 일은 죽어라 달리느라 숨넘어가는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의 인문학 프로그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해보니 괜찮은 것 같고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마치 자신이 그런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를 통해 진급하고 성장했는지부터 제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을 통해 깊은 성찰을 쌓고 인문학 소양과 생각의 융합으로 창조적 능력을 키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멋지게 포장해 가뜩이나 온갖 스펙 쌓느라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휘청거리게 하는 그런 일은 하지 말 일이다. 오죽하면 인문학을 전파하는 인문학자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그런 꼼수는 오래 가지 못하고 그러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면 다시는 찾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인문적 반성과 성찰이 결여된 인문학 열풍은 걱정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