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 순환출자 카드에 위법 판단, 집중투표제는 유지
표 대결 ‘안갯속’

[법알못 판례 읽기]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가 열린 1월 23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서울. 사진=고려아연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가 열린 1월 23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서울. 사진=고려아연
고려아연이 경영권 분쟁 상대인 영풍·MBK파트너스의 의결권을 제한한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해외 법인을 통해 기습적으로 형성한 ‘순환출자 고리’로 최대 주주의 의결권을 막은 것은 위법하다는 취지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3월 말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경영권 확보를 위한 양측의 수싸움이 한층 치열해질 거란 전망이 나온다. 법원은 일단 영풍·MBK 연합의 손을 들어줬지만 고려아연 측이 주장한 집중투표제의 효력은 인정해 결과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게 됐다는 평가다.

“상호주 의결권 제한 요건 안 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50부(김상훈 수석부장판사)는 영풍·MBK 연합이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에서 결의된 의안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며 낸 가처분 신청을 3월 7일 일부 인용했다.

법원은 △이사 수 상한 설정 △액면분할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 선임 △배당기준일 변경 △분기 배당 도입 등 집중투표제 도입을 제외한 모든 의안의 효력을 정지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영풍이 반대했다면 위 의안들은 부결됐을 것임이 계산상 명백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부분 신청을 보전할 필요성이 소명된다”고 설명했다.
영풍의 의결권이 배제된 채 임시주총에서 통과된 의안들로 인해 영풍의 권리가 침해됐고, 결의된 내용에 대해 정식으로 취소소송 절차를 밟을 경우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영풍의 권리 회복이 어려워 가처분 조치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는 얘기다.

영풍·MBK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건 지난 1월 31일이다. 1월 23일 열린 고려아연 임시주총에서 고려아연 측이 순환출자 카드를 활용, 영풍·MBK 연합의 의결권을 무력화시킨 데 대한 대응이었다.

영풍·MBK 연합은 고려아연 지분 40.97%를 보유한 최대주주인데 이날 주총에서 영풍 지분 25.42%의 의결권이 효력을 잃었다. 주총 하루 전날 선메탈코퍼레이션(SMC)이 영풍 주식 19만226주를 전격적으로 사들인데 따른 결과였다.

SMC는 고려아연이 호주에 세운 선메탈홀딩스(SMH)를 통해 설립한 아연제련 업체다. 중간 지주사 역할을 하는 선메탈홀딩스가 100% 지배해 고려아연의 손자회사로 분류된다. 이 지분 거래로 ‘고려아연→SMH→SMC→영풍→고려아연’의 순환출자 고리가 만들어졌다.
SMC에 영풍 지분을 넘긴 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등 최 씨 일가와 고려아연 계열사인 영풍정밀이었다. 상법 369조 3항은 A사가 자회사·손자회사를 통해 B사 발행주식 총수의 10분의 1을 초과하는 주식을 갖고 있는 경우 B사가 보유한 A사의 주식은 의결권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상호주 의결권 제한’ 규정이다. SMC가 취득한 영풍 주식은 전체 발행주식(184만2040주)의 10.3%에 해당했고 상법 규정에 따라 주총 당일 영풍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됐다.
영풍·MBK는 SMC가 유한회사이자 외국 회사라는 점을 들어 상호주 의결권 제한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상법상 국내회사이자 주식회사에 해당해야만 상법 369조 3항을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상법 369조 3항은 주주의 기본적 권리와 재산권을 제한하는 규정으로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며 (SMC가) 상법상 주식회사에 해당해야만 적용할 수 있다”며 고려아연의 의결권 제한 조치가 위법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SMC가 주식회사라기보다는 유한회사에 가깝다는 판단도 내놨다.
정관상 주식 양도가 원칙적으로 제한되고 비직원 주주 수를 50명으로 제한하고 별도의 조직 변경 절차 없이는 상장이 제한되는 등 상법상 주식회사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다. 이는 SMC가 호주 회사법을 따르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고려아연 측은 “외국 기업이라도 국내 활동에 대해선 국내 상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주장을 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말 주총 ‘표 대결’ 주목

다만 법원은 최 회장 측이 지분 열위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한 ‘집중투표제’ 도입 의안의 효력은 유지했다.

재판부는 “(영풍의) 의결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약 75.2%의 찬성률로 가결됐고 의결권이 제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찬성률은 약 69.3%에 달했을 것”이라며 “상법 434조에서 규정하는 특별결의의 요건(총 직원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충족할 수 있음이 소명된다”고 했다. 집중투표제 도입 의안 가결은 영풍 의결권 제한과는 무관했다는 판단이다.
집중투표제는 복수의 이사를 선임할 때 선임하는 이사 수만큼의 의결권을 주주에게 부여하는 제도다. 주주는 이렇게 확보한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몰아주거나 여러 후보에게 분산해서 행사할 수 있다.

최 회장 측은 2024년 말 집중투표제 도입을 주총 안건으로 올리면서 “소액 주주 권리 보호 차원”이라고 밝혔다. 반면 영풍·MBK 연합은 “표 대결에서 불리한 최 회장이 이사회 과반을 차지하려는 꼼수”라고 맞섰다. 우호 지분을 합한 최 회장 측 지분은 34.35%로 40.97%를 보유한 영풍·MBK 측보다 낮다.

이 재판부는 주총에 앞서 고려아연이 집중투표제 도입 의안을 상정한 것이 적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영풍·MBK 측이 낸 의안 상정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다. 집중투표제가 청구된 시점에 고려아연 정관에 집중투표제를 배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상법 규정에 어긋난다는 결정이었다.
재판부는 “집중투표의 효력은 주총 당일에서야 발생하는데 이는 주총 7일 전까지 집중투표를 청구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상법 382조 2항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법원이 영풍 의결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결의된 집중투표제의 효력을 유지하면서 3월 말 예정된 정기주총부터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될 전망이다.

시장에선 최 회장이 이 제도를 활용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리란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지분율이 높은 영풍·MBK 연합이 이사회 장악뿐 아니라 경영권 수성까지 해낼 가능성이 크다.

MBK 측은 이번 법원의 결정으로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가 가시권에 들었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돋보기]
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MBK 측 ‘악재’로 불거진 홈플러스 사태

변수는 ‘홈플러스 사태’다. 홈플러스가 기업회생 절차에 나선 가운데 대주주인 MBK의 책임론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MBK는 10년 전 전체 인수대금의 절반을 홈플러스 주식을 담보로 은행권에서 대출받아 조달했는데 과도한 차입금으로 무리한 인수를 해놓고서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자구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은 MBK의 차입 경영 형태를 두고 “먹튀(먹고 도망)”라면서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MBK가 또 하나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는 식으로 여론이 악화하면 국민연금과 기타 주주의 표심을 자극할 수 있다.

홈플러스 정상화에 총력을 다해야 할 MBK가 고려아연 인수전에 자금 등을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아연은 MBK가 자사를 인수하면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된 ‘하이니켈 2차전지 전구체’ 기술 등의 경쟁력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여론전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고려아연 측은 “이익 회수 등을 최우선으로 하는 MBK가 경영을 주도하면 고려아연의 기업가치가 크게 훼손되고 이는 결국 영풍 주주들에게도 큰 손해”라는 입장을 밝혔다.



장서우 한국경제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