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로 첫 해외 공장 문 닫아…현대정공, 사륜구동차로 뜻밖 홈런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성장통 털고 갤로퍼 신화로 MK 시대 ‘활짝’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2000년에 출간한 자서전 ‘정세영의 자동차 외길 32년-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를 통해 유난히 아쉬움을 토로한 대목이 있다. 캐나다 브로몽 공장의 실패 얘기다. 그는 “충분한 시장조사 없이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 뼈아픈 실수였다”고 되뇌었다.

1989년 7월 캐나다 퀘백 주 브로몽시, 한국 자동차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현지 공장이 완공됐다. 1986년 9월 착공한 이후 2년 10개월 만이다. 총예산 3억2500만 캐나다 달러를 투입, 169만6200㎡(51만4000평) 규모의 부지에 차체 공장과 프레스 및 도장 공장, 조립 공장, 연구소와 자동차 시험장까지 갖췄다. 포니와 엑셀로 캐나다에서 승승장구하자 완성차의 수출관세를 낮추고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공장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캐나다 정부도 부지를 1캐나다 달러에 제공하고 5년간 총 1억 캐나다 달러에 대한 이자와 전기요금 할인 혜택을 줬다. 여기에 기술진 교육 훈련 비용(940만 캐나다 달러)까지 얹어 줬다. 이들이 바라본 향후 전망은 장밋빛이었다.


아쉬움 남긴 캐나다 브로몽 공장 설립
결과는 달랐다. 연산 10만 대 규모의 공장은 1989년 1만5000대로 시작해 1990년 2만7000대, 1991년 2만8000대, 1992년 1만5000대 생산에 그치는 등 손익분기점인 연 6만 대를 밑돌았다. 1989년 이후 미국 자동차 시장이 위축되는 가운데 일본 업체들의 북미 생산이 급증하며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로몽 공장 생산 차종인 쏘나타에 대한 미국 현지 평가도 부정적이었다.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등 경쟁 차종에 비해 크게 낮은 품질이 문제였다. 자구책으로 크라이슬러를 통해 미국 시장에 연 3만 대씩 쏘나타를 공급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은 시장 여건 때문에 계약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브로몽 공장은 누적 적자가 5억 캐나다 달러에 달하자 1993년 10월 폐쇄를 결정했다. 이후 캐나다 정부가 6400만 캐나다 달러를 추가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등 공장 살리기에 나섰다. 현대차도 생산 차종을 아반떼로 변경하는 것을 검토하는 등 생산 재개를 위한 묘수를 찾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제너럴모터스(GM)·포드 등에 매각할 것도 검토했다. 하지만 결국 현대차는 캐나다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 3000만 캐나다 달러를 반환했고 브로몽 공장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세계 최대 시장인 북미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참담하게 실패한, 현대차엔 지우고 싶은 과거다.

현대차도 다른 기업들처럼 극심한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성장통을 극복하면 ‘위대한 기업’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는 반면 고통에 굴복하면 무너진다.

현대차는 브로몽 공장 실패 전에도 회사의 근간이 흔들렸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73년, 1979년 일어난 1, 2차 오일쇼크였다. 현대차도 다른 자동차 업체들처럼 어려움을 피해갈 수 없었다. 휘발유 가격은 1979년 초 리터당 198.5원이었는데 1981년 말엔 리터당 740원까지 치솟았다. 2년 만에 4배가량 급등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료 소비를 우려한 한국 정부가 자동차 수요 억제 정책을 단행했다. 자동차세 50% 인상, 신규 등록 제한 정책 등을 시행하자 현대차의 공장 가동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1만2000명의 종업원 가운데 4000여 명이 일이 없어 풀을 뽑는 등의 대체 근무를 할 정도였다. 당시 호황이었던 현대중공업에 300여 명을 전출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1981년 말 4000명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직원의 3분의 1을 내보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신차 개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동차 회사는 신차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새로운 자동차는 회사의 생존과 직결돼 있었다. 현대차는 1978년 7월부터 포니의 페이스리프트(포니2)를 준비했다. 첫 번째 포니를 디자인했던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스타일링 용역을 주고 기존 부품을 절반 이상 교체하며 포니를 업그레이드했다. 산고 끝에 1982년 3월 출시된 포니2는 첫해 3만9344대, 1984년 4만226대가 팔리며 현대차의 허리를 지탱했다.

오일쇼크 이후 국내 정치 상황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자동차 산업이 유탄을 맞기도 했다. 1978년 유신체제 붕괴 후 등장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내세운 ‘비교 우위론’이 바로 그것이다. 한 나라가 두 가지 재화 생산에 강점에 있더라도 하나의 재화만 만들어 나머지 재화는 다른 나라와 교환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점이 주된 내용이다. 심지어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동차 산업은 미국 GM에 맡기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 보면 황당하지만 당시 현대차는 이 논리에 의해 문을 닫을 뻔했다. 결국 정부는 한 회사가 하나의 산업을 전부 담당해야 한다는 방침에서 물러서 한 회사가 한 차종만 독점 생산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차종별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후 승용차는 현대차와 새한자동차(미국 GM이 50% 지분 보유)가 생산하고 기아산업은 5톤 이하 트럭과 버스를 독점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그 덕분에 현대차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포터 등 모든 트럭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책은 1986년 폐지될 때까지 6년간 지속됐다.

포니가 첫 해외 수출 성과를 이뤘다면 엑셀은 미국 상륙에 성공한 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시장으로 절대적인 입지를 갖고 있었다. 현대차 역시 미국 시장에 진출할 목표가 있었다. 1983년 11월 캐나다로 포니2를 1500대 선적하며 북미 시장을 처음으로 공략했지만 미국엔 배기가스 규제에 걸려 수출하지 못했다. 포드가 갖고 있는 미국 내 포니 상표권도 걸림돌이었다. 포드는 현대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 상표권을 쥔 손을 펴지 않았다.


미국 시장 진출을 겨냥한 야심작 엑셀
현대차는 포니가 아닌 새로운 차종으로 미국 시장을 뚫기로 했다. 미쓰비시가 미국에 진출할 때 판매망 설립에 기여한 전문 용역 기관 ‘템플, 베이커 앤드 슬로언(현재 머서올리버와이만 컨설팅)’을 통해 시장조사를 하고 전륜구동 방식의 ‘엑스카(X-car)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약 2년 동안 미국 진출을 위한 조사를 착실히 진행한 현대차는 1986년 2월 ‘뛰어난’이라는 뜻의 엑셀(Excel)을 출시했다. 이 차는 출시 직후 미국에서 3월 한 달 동안 무려 1만432대가 팔렸으며 1986년 한 해에만 9만2609대를 수출했다. 포천이 선정한 ‘1986년 미국 10대 상품’으로 꼽힐 정도로 성공적인 진출이었다. 하지만 곧 문제가 생겼다. 차를 산 소비자들이 엑셀의 품질을 비판했다. 경쟁이 치열한 세계 최대 시장에 입성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였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성장통 털고 갤로퍼 신화로 MK 시대 ‘활짝’
정주영·정세영 1세대가 현대차를 설립하고 포니·엑셀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면 글로벌 톱 5 업체로 발돋움하게 한 주역은 2세대인 정몽구(MK) 현대차그룹 회장이다. 1938년 8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공대 졸업 후 미국 코네티컷대에 2년간 유학했다. 당시 그는 미국 현지 자동차 프레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동차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70년 2월 현대차 서울사무소 부품과장으로 취업한 그는 자동차 정비에 몰입했다. 세계 자동차 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그만큼 애프터서비스(AS) 분야에 오래 근무한 사람은 없다. 이런 배경 때문에 MK는 회장에 오른 뒤에도 직접 장갑 낀 손에 기름을 묻히고 신차가 나오면 직접 세부 사항까지 지시한다.

그는 1973년 현대조선 자재부에서 잠시 일했지만 1년 만인 1974년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현대차에서 AS사업부를 분리하며 처음 수장을 맡았다. 그 회사가 ‘현대자동차써비스’다. 현대차써비스는 1975년 자동차 필터를 납품하던 대신양행이 부도가 나자 이를 인수해 필터 제조업에 진출했다. 이후 밸브와 컨테이너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하지만 컨테이너 사업은 자동차 부품 제조 및 정비와 성격이 판이하다고 판단해 1977년 사업을 분리하며 새로운 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추후 현대모비스의 전신이 된 현대정공이었다. 현대차써비스는 1970년 후반까지 고속 성장했다. 하지만 오일쇼크와 10·26사태로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인건비가 급상승했다. 회사 자산이 곧 사람인 현대차써비스 경영에 적신호가 켜졌다. MK는 정주영 회장에게 보고한다. “현대차써비스가 계속 커 나가려면 자동차 판매를 접목해야 합니다. ‘생산과 판매의 분리, 판매와 정비의 일원화’가 필요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MK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1982년 현대차써비스는 경인 일부와 영남을 제외한 전국의 현대차 판매권을 이관 받았다.

현대차써비스와 현대정공의 사업을 궤도에 올려 놓은 MK가 정주영 회장에게 사업 수완을 인정받은 또 하나의 사례 중 하나는 ‘갤로퍼’ 프로젝트였다. 1987년 이후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하자 현대정공의 컨테이너 사업이 한계에 달했다. 그때까지 직접 관여한 자동차와 관련된 일이라곤 AS와 판매뿐이었던 MK는 결심했다. “완성차를 만들어야겠다.”


쌍용차 아성 무너뜨리고 사륜구동 시장 1위
시작은 골프 카트였다. 1987년 미국 존 디어사의 도움으로 골프 카트를 생산하며 자신감을 얻은 MK는 1988년 7월 지프차로 불리는 사륜구동 자동차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에는 쌍용차가 ‘코란도’로 사륜구동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이었고 현대차는 캐나다 브로몽 공장 건설로 사륜구동차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MK는 이 틈새를 주목했다. 현대정공은 현대차 지분 15%를 갖고 있던 미쓰비시에 로열티를 주며 엔진·변속기·섀시 등 기술을 제공받았다. 당초 포니와 같은 독자 모델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시간과 비용 문제로 전략을 수정했다. 미쓰비시의 사륜구동 명차 ‘파제로’를 국산화한다는 것이다. 조립 생산(CKD)에 가까운 개념이었지만 현대정공은 회사의 미래가 걸린 프로젝트인 만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MK 역시 갤로퍼 시제차를 손수 운전해 본 뒤 “스쿠프용 스티어링 휠을 적용해선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며 “대형 핸들을 새로 개발해 장착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1991년 10월 출시된 갤로퍼는 4개월 만에 쌍용차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1위에 올랐다. 당시 업계에선 ‘혜성처럼 등장한 차가 기적을 만들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갤로퍼는 첫해에 1만6000대, 1992년엔 2만5000대가 팔려 나갔다. 이어 1995년 7인승 미니밴 ‘싼타모’까지 성공하자 정주영 회장은 MK의 역량을 확신했다. 장자로서 사업 수완을 인정받은 MK는 1995년 12월 28일 현대그룹 회장에 선임됐다. 동시에 정세영은 현대차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본격적으로 MK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