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닛산 V자 회복 이끈 카를로스 곤의 마법…삼성차·다치아 등 인수 행진
“조합이 요구한 5.2개월분의 연간 1차금(보너스)을 드리겠습니다.”2001년 일본 도쿄의 닛산자동차 본사 강당에 참석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동시 통역기를 통해 카를로스 곤 최고운영책임자(COO·부사장)의 말을 들은 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곤 부사장이 자신들이 요구한 임금 단체 협상 요구안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곤 부사장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임금 인상액도 지난해 6500엔보다 상향 조정한 7000엔으로 책정했습니다.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 대한 보답입니다.” 더 이상 교섭의 줄다리기는 의미가 없었다. 닛산은 통상적으로 노조가 요구안을 내놓은 후 춘계 투쟁 직전까지 신경전을 벌이다가 도요타자동차의 결과를 본 후 합의점을 찾곤 했다. 노조 요구안을 받자마자 내놓은 곤 부사장의 답변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1996년 9월 르노의 ‘넘버 3(부사장)’가 된 곤 부사장은 과감한 비용 절감과 체질 개선 작업을 통해 적자에 시달리던 르노와 닛산을 ‘단숨에’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두 기업이 합치면서 세계 4위 제조사로 올라선 르노-닛산얼라이언스는 이후 곤 부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다치아·삼성자동차·아브토바즈 등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인수·합병(M&A)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카를로스 곤, “기업은 성장해야 한다”
1996년 당시 곤 부사장을 전격 영입한 루이 슈바이처 회장은 그에게 기술·개발·제조·구매에 대한 전권을 쥐여 줬다. 이전 경력을 고려해 남미 지역도 담당하게 했다. 프랑스 최대 자동차 회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곤 부사장은 망설임이 없었다. 다른 최고경영자(CEO)들이 업무 파악에 쓸 법한 5개월의 기간 동안 그는 20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삭감 계획을 세웠다.
더 주목할 점은 추진력이다. 그는 1997년 2월 벨기에의 비베르보르드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300명의 근로자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고 5개월 만인 9월 공장은 문을 닫았다. 3월에는 프랑스 내에서도 2700명의 인원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르노는 정부가 지분율을 46%로 낮추면서 민영화된 첫해인 1996년에는 52억5000만 프랑(1050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듬해인 1997년에는 54억3000만 프랑(1185억 엔)의 흑자로 돌아섰다. ‘V자형 회복’이었다. 1997년 9월 그가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업이 힘든 상황에서 손실을 내고 있을 때에는 강력한 대응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르노는 과도한 비용 구조가 최대 문제점이었습니다. 기업은 성장해야 합니다.”
탄력을 받은 르노는 추가로 성장 계획을 내놓았다. 1997년 11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동안 총 200억 프랑(4000억 엔)의 비용 삭감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부품 거래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곤 부사장은 부품 공급 업체를 줄이고 장기거래를 보증하는 대신 납품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이른바 ‘옵티마 제도’였다. 그에게 ‘코스트 커터(비용 절감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코드네임 퍼시픽’이라는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한 끝에 극적으로 성공한 르노-닛산의 합병은 성장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험한 도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악화될 대로 악화된 닛산의 재무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두 회사 모두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1999년 4월 2일 닛산의 COO로 부임한 곤 부사장은 닛산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는 이를 닛산 리바이벌 플랜(NRP)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플랫폼(섀시와 파워트레인) 통합과 부품 공유였다. 그는 두 회사 합쳐 34종에 달하는 플랫폼을 10종으로 줄이기로 했다. 생산·판매망도 중복을 줄이고 효율화해야 했다. 르노의 브라질·아르헨티나 공장과 판매망을 닛산이, 닛산의 멕시코 공장을 르노가 활용하는 등 글로벌 생산·판매망에 대한 공유 작업이 진행됐다. 이를 통해 2000년부터 3년 동안 3900억 엔의 비용을 삭감했다.
생산 체계도 전열을 재정비했다. 곤 부사장은 일본 내 5개 공장을 폐쇄하고 3년간 세계 닛산그룹 사원의 14%에 해당하는 2만1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1966년 프린스자동차를 인수하면서 함께 넘어온 근로자 2300명의 무라야마 공장 폐쇄 조치는 닛산 안팎에 큰 충격을 줬다. 역사가 깊고 장기근속 직원이 많은 공장이었기 때문이다. 곤 부사장 역시 “NRP 실시 후 무엇보다 마음이 아팠던 것은 사람들이 공장을 떠나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획을 추진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기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다.
곤 부사장은 이외에도 닛산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총 1394개 기업 중 4개를 제외한 모든 기업의 지분을 정리했다. 또한 당시 1145개에 달하는 부품사와의 거래를 2002년까지 600개 이하로 줄였다. 당시 일본 산업계를 흔들었던 닛산의 계열 기업 폐지 작업이다. 닛산의 문제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이를 말끔하게 도려내는 곤 부사장의 업무 방식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골칫덩이 닛산 디젤, 볼보의 품으로
곤 부사장의 계획은 곧 V자 실적으로 효과가 증명됐다. 2000 회계연도(1999년 4월~2000년 3월)에 6800억 엔의 적자를 기록한 닛산은 2001 회계연도(2000년 4월~2001년 3월)에 3311억 엔의 흑자로 돌아섰다. 2000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260만 대를 판매해 2년 만에 도요타 다음으로 일본의 2대 제조사로 올라섰다. 이후 곤 부사장은 2005년 6월 1일 슈바이처 회장의 뒤를 이어 르노그룹 회장과 닛산의 CEO에 취임했다.
닛산이 다른 업체들과 자본 제휴를 추진한 원인 중 하나는 트럭 제조 계열사인 ‘닛산 디젤’이 안고 있는 막대한 부채였다. 닛산 디젤은 당시 이자 부채만 5000억 엔에 달했다. 일본 은행들은 이미 이 회사에 등을 돌린 상황이라 추가적인 자금 지원도 불가능했다. 판매 실적도 신통치 않아 2000 회계연도 기준으로 440억 엔의 적자까지 기록했다. 르노는 닛산의 주식 36.8%를 확보하면서 닛산 디젤의 지분 23.5%도 취득했다. 하지만 곤 회장을 비롯한 르노 경영진은 닛산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닛산 디젤에 대한 세밀한 전략을 세우지는 않았다.
곤 회장은 2000년 4월에야 닛산 디젤을 처음 방문했다. 같은 달 25일 르노는 스웨덴의 볼보와 트럭 부문을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르노의 트럭 부문 자회사인 르노 NI(RVI)와 르노가 미국 진출을 위해 인수했던 맥(MACK)을 볼보에 매각하고 르노가 볼보의 지분 21.4%를 취득하면서 대주주가 된다는 것이다. 볼보 역시 골칫덩이였던 자동차 부문을 포드에 매각하고 트럭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볼보트럭은 세계 2위 트럭 제조사가 됐다. 트럭 업계에서 큰 변화였다. 닛산 디젤 역시 자연스럽게 볼보의 지붕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후 이 회사는 사명을 ‘UD트럭’으로 바꿨다. 르노는 이후 재무 개선 및 M&A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볼보그룹의 주식을 매각했다. 2010년 볼보그룹의 주식 중 14.9%를 30억 유로에 매각했고 2012년에는 15억 유로에 잔여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 르노는 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2000년 4월 27일 르노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했다. 부산 자동차 생산 공장과 부지, 연구소 등 자산을 총 5억60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지분은 르노가 80.1%, 삼성카드가 19.9%다. 삼성이 자동차 제조에서 손을 뗀 것은 맞지만 19.9%의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에서 완전히 눈을 돌렸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삼성SDI를 비롯한 그룹 내 여러 계열사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 등 다양한 부품 사업을 확대하는 추세다. 삼성그룹이 향후 자동차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할지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삼성자동차에서 사명을 바꾼 르노삼성은 당시 ‘헐값 매각’ 논란을 겪었고 이후 신차 개발 지연과 SM3, SM5, SM7, QM5 등 4종에 불과한 차종의 경쟁력 약화 등으로 판매 부진을 겪어 왔다. 이와 함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희망퇴직 등을 진행했다. 곤 회장이 르노삼성에도 리바이벌 플랜을 추진하며 비용 감소를 강조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철수설’, ‘르노삼성 매각설’도 나돌았지만 지난해 말 QM3 출시와 닛산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수출 모델 생산 등으로 조금씩 체력을 보강하는 중이다.
러시아에 이어 중국 시장 정조준
‘큰 기업’을 지향하는 르노의 욕망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996년 민영화 이후 오늘날 세계 4대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공격적인 M&A 및 자본 제휴 덕분이었다.
르노와 닛산의 자본 제휴 작업이 한창이었던 1999년 르노는 또 다른 인수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번엔 루마니아였다. 1999년 말 르노는 다시 한 번 업계를 놀라게 했다. 루마니아 최대 국영 자동차 회사인 다치아의 지분 51%를 확보, 경영권을 취득한 것이다. 이는 현재 브랜드 차별화 전략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루마니아의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값싸고 튼튼한 차를 만들어 기존에 중고차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던 고객층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지난 한 해 동안 34만 대를 생산했다. 전년 대비 16% 늘어난 역대 최대치다. 판매량은 43만 대를 기록했다. 지난해보다 19.3% 증가한 역대 최대치다. 유럽연합(EU) 국가의 완성차 업체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기도 하다.
다치아는 고대 로마인들이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루마니아 국민차’인 다치아에선 르노의 DNA를 발견할 수 있다. 이 회사는 1968년 소형차 ‘르노8’ 모델을 그대로 들여와 생산, 판매하면서 설립됐다. 유럽 최저 수준인 루마니아의 시간당 인건비(3.75유로)를 무기로 깔끔한 디자인과 내구성 좋은 세단, SUV를 내놓은 다치아는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 소비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르노는 2004년 다치아의 지분을 99.3%까지 확대하며 완전히 품에 안았다.
다치아에서 성공을 맛본 르노-닛산은 생산 지도를 러시아까지 넓혔다. 2008년 러시아 국영 자동차 제조사 아브토바즈의 지분 25%를 11억7000유로(17억 달러)에 인수했고 3년 뒤인 2011년 25%를 추가 취득해 경영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올해 합작사 설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러시안테크놀로지(아브토바즈 지분 29% 보유)와 합작사를 설립한 후 합작사의 지분 67.13%를 갖기로 한 것이다.
1966년 이탈리아 피아트와 기술 협력으로 설립된 아브토바즈는 ‘피아트 124’를 원형으로 1970년 세단 ‘지굴리’를 내놓았다. 이 차의 수출명은 ‘라다’였다. 이 차는 아브토바즈에서 1991년까지 21년간 큰 변화 없이 생산, 판매됐다. 1970년 기아자동차의 자매사인 아시아자동차공업이 피아트와 합작해 ‘피아트 124’를 내놓기도 했으니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셈이다.
지난해에는 둥펑기차와 합작사를 설립하며 중국 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북미 시장에서는 닛산의 영향력이 크지만 중국에선 그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르노의 지원사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계 자동차 지도를 들여다본 곤 회장의 결단이다. 르노-닛산얼라이언스와 곤 회장은 지금도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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