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첫 대기업 사정, 검찰 기소 내용 큰 폭 후퇴

지난해 유력 언론사가 선정했던 ‘10대 뉴스’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다. 언론·정치권·학계 등을 가리지 않고 우려되는 인사로 지목된 주인공이 결국 대형 사고를 친 건 정부 출범 초기인 2013년 5월 8일이었다. 대통령의 방미 기간 동안 인턴사원으로 고용한 교포 여대생을 성추행한 전대미문의 추문이었다.

국민적 관심이 윤 전 대변인과 청와대에 쏠린 사이 새로운 이슈가 터져 나왔다. 5월 20일 밤 10시 동아일보 종편 채널인 채널A가 “검찰이 CJ그룹의 해외 비자금 반입 정황을 포착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고 단독 보도한 것이다. 이어 검찰이 이미 2010년부터 금융정보분석원으로부터 CJ그룹의 자금 흐름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받아 내사를 벌여 왔고, CJ가 역외에서 조성한 비자금 중 70억 원가량을 한국으로 들여와 운용한 정황을 포착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이슈는 이슈로 덮인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윤 전 대변인 성추행 사건은 대기업과 총수의 비자금 수사에 묻히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기업 사정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법과 원칙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의 기조상 기존의 대기업 총수 봐주기 수사 같은 상황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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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검찰은 처음부터 CJ그룹 오너 일가를 정조준하며 강공에 나섰다. 밤늦은 시각 채널A가 단독 보도한 뒤 바로 다음날인 5월 21일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는 CJ 본사·CJ제일제당센터·CJ경영연구소·CJ인재원·임직원 자택 등 대대적인 압수 수색에 나섰다. 이날 오전 6시 30분부터 시작된 압수 수색은 13시간이 넘은 오후 8시에야 끝났다. 압수수색영장에 적시된 혐의는 특별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 포탈 혐의. 최초 보도 내용과 같은 혐의였다.


의혹 보도 직후 압수 수색
전격적인 압수 수색은 공중파와 인터넷을 가릴 것 없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으레 그렇듯이 언론의 취재 경쟁도 가열되기 시작했다. ‘불과 몇십 억 원의 비자금 조성에 검찰이 대대적인 압수 수색에 나섰겠느냐’는 전망과 함께 비자금의 규모가 수백억 원에 이른다는 추측성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종합편성 채널은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의혹 제기에 나서며 이슈를 주도했다. 근거가 희박한 종편의 추측성 보도가 계속되자 그 배경을 의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같은 케이블 채널이지만 ‘프로그램 사용료’ 문제로 경쟁 관계에 있는 프로그램 공급자(PP)와 종편 사이의 갈등을 무리한 추측 보도와 연관 지은 주장이었다. 또 이런 과정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검찰이 언론의 추측 보도를 사실상 방기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때마침 압수 수색 다음날인 5월 22일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조세 피난처에 특수목적법인이나 계좌를 보유한 한국인을 공개했는데,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재계 거물들에게 쏠렸다. CJ 역시 특수목적법인을 통해 역외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CJ CGV와 CJ대한통운의 정상적인 해외 법인이 애꿎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검찰은 역외 비자금 조성과 탈세의 핵심을 해외 미술품 구입 과정에서 찾으려고 했다. 홍성원 서미갤러리 대표를 통해 1422억 원어치의 미술품을 사들였는데, 자금 출처가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기소 단계에서 특수목적법인을 통한 허위 거래나 미술품 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5월 27일 CJ그룹 소속 9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1조1000억 원이나 증발했다.


수사 과정에서 형평성 논란도
검찰은 2013년 5월 29일 드디어 이재현 회장 자택의 압수 수색에 나섰다. 또 일본 빌딩 대출과 관련해 신한은행 본점도 압수 수색했다. 이어 6월 25일 이 회장을 소환 조사했고 7월 1일에는 구속 수감이 결정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첫 대기업 총수의 구속이었다.

‘범죄에 성역은 없다’는 의지 표명에도 불구하고 수사가 진행될수록 애초에 제기됐던 의혹들은 ‘요란한 빈 수레’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선 처음 제기됐던 주가조작, 불법 증여, 비자금 유입 같은 의혹들은 검찰이 실제 기소한 내용에는 쏙 빠졌다. 검찰이 이 회장에 대해 기소한 내용은 조세 포탈·횡령·배임 세 가지뿐이다. 조세 포탈은 2005년과 2012년 사이에 설립된 해외 특수목적법인을 통해 주식거래 및 배당 수익금의 양도소득세를 탈루했다는 혐의다. 횡령은 국내외 법인의 회계장부를 조작해 수백억 원의 부외 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고, 배임은 일본에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CJ 일본법인에 연대보증을 서도록 해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수사 초기 수천억 원대 비자금 조성과 주가조작, 불법 증여 같은 대형 이슈들이 사라진 자리에 수백억 원의 탈세·배임·횡령이라는 기소 내용은 기대 이하라는 게 업계의 시선이다. 대기업 총수가 구속 수감되며 엄청난 비리 백화점을 발굴했다는 의혹들도 점차 힘을 잃고 있다. 검찰이 기소한 내용도 실제 재판 과정에선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검찰의 CJ 비자금 의혹 인지는 2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살인 청부 혐의로 기소됐던 이지영 전 재무2팀장 사건을 통해 이미 상당한 내사 자료를 확보하고 있던 것. 이지영 전 팀장은 2005년 CJ그룹의 재무2팀장으로 근무했던 인물로, 이 회장의 개인 재산을 사채업자에게 빌려줬다가 받지 못하자 청부 폭력을 행사해 살인 미수 교사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2012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으로 이 회장은 선대 회장으로부터 받은 상속재산에 대해 1700억 원을 세금으로 납부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 전 팀장으로부터 확보한 부외 자금 및 이 회장의 개인 재산 결산 내역(일계표)을 토대로 603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부외 자금이 공적으로 사용됐고 불법적으로 이를 취할 의도도 없었다”는 이 회장 측 주장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심지어 검찰의 핵심 증인인 이 전 팀장의 진술도 뒤집혔다. 변호인 신문 시 “차량 구입·와인·미술품·무기명채권 구입 등 사적 사용은 모두 이 회장의 차명 재산 매각 대금으로 이뤄졌다”고 진술한 것이다.

결국 검찰은 부외 자금 조성일을 기준으로 횡령에 대한 기소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재판부에서 “횡령의 경우 부외 자금 조성 행위 자체가 아닌 사용 행위가 특정돼야 혐의 입증이 가능하다”며 검찰의 입증 책임을 요구한 바 있어 앞으로 이 부분도 재판부 판단이 주목된다.

검찰이 탈세로 보는 특수목적법인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대해서도 법조계의 시각은 엇갈린다. BW 발행 시기인 1999년에는 양도세 과제 규정 자체가 없었고, 납세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독립적 법인격을 갖고 있는 특수목적법인에 있다는 견해다. 일본 부동산 구입 시 연대보증에 관해 횡령과 배임을 모두 적용하면서 손해액이 과도하게 책정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판부도 “하나의 대출에 벌어진 일련의 담보 제공을 별개의 손해로 볼 수 있는지 검토해 보라”고 검찰에 주문한 상태. 결국 검찰은 4차 공판에서 공소장을 변경해 배임 혐의만 적용했다. 이에 따라 검찰의 전체 기소 금액은 애초 2078억 원에서 420억 원이 줄어든 1657억 원으로 바뀌었다.

한편 수사 과정상의 형평성도 논란의 대상이다. 1조 원대 분식회계를 통해 법인세 1000억 원 포탈, 차명 재산 운용을 통한 양도소득세 포탈, 역외 탈세, 해외 법인을 통한 800억 원대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게 불구속 기소가 결정되면서다.

현 정부 들어 첫 대기업 비자금 수사와 총수 구속 수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된 CJ 비자금 수사. 하지만 제기됐던 의혹들에 ‘혐의 없음’이란 판결이 이어지고 쟁점이 된 혐의들도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지면서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레 힘을 얻고 있다.
이 회장에 대한 1심 선고는 CJ그룹 압수 수색 수사가 시작된 지 9개월 만인 2월 14일쯤 나올 예정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