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판 짜기 주문하는 ‘미스터 쓴소리’ 최공필 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는 긴급 수혈만 하면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곪아터져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상태다. 누가 어디를 어떻게 고치느냐. 답이 없는 상황이다.”지난 11월 27일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난 최공필(55) 상임자문위원은 한국 경제의 위기 실태를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대기업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부와 기업, 각종 이해 단체 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썩은 관행을 뿌리째 뽑아내고 ‘개방’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새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 위원은 정부에 직언을 잘해 금융계와 학계에서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는 인물이다. 특히 외환 위기 직전인 1997년 3월에는 ‘경제 전망과 금융 외환시장 동향’ 보고서에서 자체 개발한 국가 위험 지표를 통해 금융·외환 위기를 경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1999년 국회의 ‘IMF 환란 조사 특위’에 참고인으로 불려나가 경제 이론가로선 이례적으로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16년 전 IMF 위기와 지금은 어떻게 다릅니까.
1997년 IMF 위기가 재현되는 모습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입니다. 당시는 그야말로 기업이 고도성장하면서 외채를 끌어 쓰다 유동성 위기에 잠시 몰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재정적 기초 여건도 튼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뼛속까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전반적인 수요가 위축돼 기업은 수익성 확보가 어렵고, 국내 투자를 꺼리고 있어 저성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계 부채가 많아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이 갈수록 줄어들고 소비자들은 돈이 없다 보니 더 그렇습니다. 이는 투자 감소, 실업률 증가, 저성장을 불러와 기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최근 위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요.
지금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 돼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기업은 스스로 갈등 요인을 관리하지 못하고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중진국의 함정(middle-income trap)에 빠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그 위로 점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데, 사실 이 함정을 극복한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성공 모델로 분류되고 있지만 현재의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혹독했던 과거 IMF 경험을 반복할 겁니다.
미국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데, 국내에도 훈풍이 불지 않겠습니까.
미국 주가가 오르고 있지만 위기를 극복한 게 아닙니다.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일시적으로 띄운 것이죠. 언젠가는 걷혀질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걱정은 둘째 문제입니다. A부터 Z까지 경제활동에서 필요한 모든 정책이 마련돼 있는 이 나라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긴축 통화정책을 펼치고 돈을 찍어내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르죠. 한국은 외부 수혈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재정 운영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부 성장 동력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삼성이나 현대차 그룹과 같은 캐시 제너레이터(cash generator:현금 창출기)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연관 산업의 발달이 절실한 거죠. 그래야 국내 투자가 이뤄지고 고용이 창출되며 선순환 구조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용 없는’ 성장 패턴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비극을 불러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없었나요.
증상이 나타나면서 관료들이나 정치인에게 위기의 조짐을 알렸지만 모두 묵과했습니다. 수많은 국책 연구원들, 지금 왜 이렇게 조용히 있습니까. 모든 기구가 자신의 목줄이 달아날까 ‘쉬쉬’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공백 기간에 위기관리를 놓친 게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 IMF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발전 과도기상의 공백 문제를 정치인들이 이것저것 간섭하는 통에 자본주의 체제가 시장 원리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5년마다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서 바뀌고 또 바뀝니다. 1년만 지나면 다 흐지부지됩니다. 이게 대한민국 민주화의 부작용입니다. 새 정권을 쥔 자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나가는 동안 소비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체 이걸 몇 번이나 더 해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정부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 우리나라는 절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안전한 상태로 가기 어려워집니다. 더 이상 같은 문제를 두고 답습할 것이 아니라 구조 개혁을 해야 합니다.
정책적 측면에서 문제는 없을까요.
세상은 모두 개방됐고 정부 부처도 서로 다른 부처가 오버래핑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상부의 결정 구조는 여전히 칸막이 식입니다. 전보다 더 심해졌어요. 이거 정말 미스매치(부조화) 아닙니까.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모든 게 개방됐다지만 실제 결정 과정을 보면 그저 자기 부처만 보고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공공 부문의 결정 과정이 굉장히 비효율적인 게 많아요. 이런 비효율성을 극복하자고 규제 완화를 해라 마라 얘기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대기업을 위한 규제는 공무원의 책상에서 나옵니다. 어차피 규제를 완화해도 큰 도움이 안 되는 거죠.
기업에 필요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기업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개인 잠재력’을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다양성이 존중돼야 창의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창의성은 이노베이션의 핵심입니다. 이 창의성은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해법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주변을 넓게 보는 시각을 갖고 관용하는 자세가 정책 10개보다 낫습니다. 국내에서는 좋은 기술이 있어도 내놓지 못하고 사장되는가 하면 헐값에 팔리는 일이 흔합니다.
위기가 반복되는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가 고도성장기에 재벌 위주로 커오면서 노정된 나쁜 관행들 때문에 그 잠재력이 기업화되지 못하고 사장돼 온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창의성은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는 차원에서 굉장히 좋은 시도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기업 전체가 판을 바꿔야 하는데요, 이미 익숙해진 모든 관행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자도 해외보다 국내에 해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지 않고 여기에 수용될 수 있을 만큼 국내에 기반 투자를 해야 된다는 거죠. 그러나 사실 국내 투자도 쉽지 않습니다. 노조 등 사회 갈등 요인이 너무 많기 때문에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재도약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길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부도 보조를 맞춰 줘야 합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기업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니까요. 충분히 합리적이고 민주화된 방법, 창조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정부가 지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개방하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해 여느 국가 못지않게 성장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현실을 직시한 것만 해도 큰 성과입니다. 전문가들은 먼저 위기 진단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기업은 마비 상태인데, 다들 숏 템포입니다. 단기 전략이 아닌 장기 전략이 필요한 때입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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