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등장했지만 제자리걸음…잦은 업그레이드·분산된 체계 등 걸림돌

[CEO를 위한 테크 트렌드] ‘꿈의 시스템’과 거리 먼 홈오토메이션
주말이 되면 나들이 가자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야구 중계를 보다가 잠이 드는 아빠. 많은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 이런 아빠를 만든 주범은 무엇일까.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집안일로부터의 회피 본능? 이런 빤한 답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가령 만약 프로야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TV를 없애거나 리모컨을 거실에서 사라지게 해 보자. 이쯤 되면 주말 나들이의 문제를 넘어 엄마와 아이들 모두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사라진 현실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작년 봄 미국에서 전해진 부고에 그동안 기술의 역사에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깊은 애도를 표한 한 발명가의 죽음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LG에 인수된 세계적인 전자회사로 알려진 제니스에서 세계 최초로 TV 리모컨을 발명한 유진 폴리가 세상을 뜨자 리모컨 없는 거실을 상상하는 것이 두려운 수많은 사람들이 새삼 폴리의 발명이 우리에게 안겨준 많은 변화를 떠올렸던 것이다. 요즘 리모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을 사용한다. 어떤 스마트 기기들은 무선 인터넷이나 블루투스 등의 첨단 무선 통신 방법을 활용해 기계를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창기 리모컨 중에는 마치 손전등처럼 가시광선을 활용해 TV와 통신을 주고받았던 제품도 있다. 그러다 보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도 TV가 반응해 본의 아니게 방을 깜깜하게 만들어 극장처럼 TV를 봐야 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주말의 게으른 아빠를 양산하고 있는 리모컨은 가시광선 리모컨 시절로 돌아가면 TV를 조작하기 위한 제품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은 어지간한 집에서도 여러 개의 리모컨을 사용해야 하는 환경이 됐다. TV용 리모컨은 기본이고 케이블 방송을 위한 셋톱박스용 리모컨, 음악 재생을 위한 홈 시어터의 리모컨을 비롯해 에어컨도 리모컨으로 작동하고 심지어 선풍기나 커튼도 리모컨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거실에는 리모컨 여럿이 수북이 쌓여만 가고 지금 내게 필요한 기능을 작동하기 위한 리모컨이 어떤 것인지 잘 기억해 둬야 하는 새로운 스트레스가 더해지고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게 통합 리모컨이다. 최소한 TV와 셋톱박스, DVD 플레이어 등의 AV 제품을 제어할 수 있는 제품이 주를 이루는데, 이런 제품이 나온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의 리모컨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왜일까.


유명무실한 통합 리모컨
통합 리모컨이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은 대개 전원·채널·볼륨 기능의 제어에 더해 DVD 플레이어의 재생과 정지 등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나날이 관련 제품들의 기능이 다양해지고 특히 각 가전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다른 회사와 차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기능을 추가하면서 통합 리모컨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기능들이 매일매일 더해지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기능 이외의 부가 기능을 사용하는 빈도는 극히 낮다. 하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아주 가끔 사용하는 특이한 기능을 위해 각 제품의 리모컨을 사용하기를 고집하기도 하고 통합 리모컨을 쓰더라도 부가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각 제품의 리모컨을 거실 어딘가에 쌓아두기도 한다. 즉 기본적인 기능만 쓰겠다면 별문제가 없지만 왠지 최신 제품을 사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거실의 AV 제품을 비롯해 집안의 가전제품을 통합해 제어하고 이를 통해 삶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려보겠다는 목적을 지닌 대표적인 제품이 홈오토메이션이다. 각종 버튼들이 달려 있는 제어장치가 거실에 큼지막하게 달려 있고 이와 연결된 현관의 CCTV, 경비실과 연결된 인터폰에서부터 보안 기능 설정, 설정된 시간에 따라 냉난방 시스템이 가동되고 전등이 켜지고 꺼지게 하기도 하는 등 실로 많은 기능이 홈오토메이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구현되고 있다. 미래형 도시를 연상시키는 최첨단 아파트의 분양 전단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런 시스템은 사실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됐다. 최초로 가전제품을 제어하겠다는 홈오토메이션이 등장한 것은 무려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 길게 돌아보지 않더라도 20~30년 전 아파트 분양 전단지에서 현재의 기능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홈오토메이션의 구축을 자랑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홈오토메이션과 현재의 홈오토메이션 사이에서 집 안을 제어한다는 원래의 목적과 기능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관심을 받고 제품 개발과 시장 형성에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왜 여전히 시장은 초창기 상황에서 맴돌고 있는 듯 보일까. 여기에는 여러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통합 리모컨과 마찬가지로 홈오토메이션 시스템에 포함돼야 하는 제품군의 발전이 너무나도 일찍 그리고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다. 수십 년 전에는 단지 집 외부에서 에어컨을 켜고 끄는 기능만 제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설정 온도를 조절하고 각 방마다 설치된 에어컨을 각각 조작할 수 기능도 요구된다. 이렇게 각 제품들의 기능이 크게 개선될 때마다 결국 그 기능들을 모두 사용하는 꿈의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선 기존의 홈오토메이션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는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에어컨을 켜고 끄는 기본 기능만 사용하겠다면 별 상관이 없지만 멋진 시스템 에어컨을 장착했으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으려면 홈오토메이션도 업그레이드해야만 한다.

더구나 각 회사들마다 제어 체계가 다르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사용자가 볼 때 모든 회사가 리모컨 체계를 표준화하면 A 회사 제품의 리모컨으로 B 회사 TV를 켜서 원하는 채널을 보는 데 큰 지장이 없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하드웨어의 발전은 아주 잦은 시스템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하고 예전 제품과 신제품 사이의 단절을 가져오곤 한다. 천연색 발광다이오드(LED) 화면이 아니라 초록색만 난무하는 모노 톤의 화면이 장착된 홈오토메이션이 첨단 주상복합아파트에 장착돼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예전에 어느 PC 회사에서 신제품을 출시하며 앞으로 이 컴퓨터를 사면 중앙처리장치(CPU)를 비롯한 각종 부품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해 평생 사용할 수 있다는 광고를 한 적이 있다. 물론 하려면 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하면 마치 인간의 장기를 하나씩 바꿀 수만 있다면 무한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과도 비슷한 얘기다. 이런 잦은 업그레이드에 따른 제품 교체의 비용과 피로감 때문에 최근에는 핵심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출시할 때 이를 따로 구입해 장착하면 언제나 최신의 TV 기능과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제품도 발매됐다.


만물 인터넷이 새로운 가능성 열까
이렇게 이미 상당 수준으로 발전, 안정된 상태에 이른 여러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합해 시스템이나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기술적인 어려움을 뛰어넘어 보다 복잡한 문제에 봉착해 어려움을 겪곤 한다. 물론 이런 통합을 위한 노력이 항상 실패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만 있다면 거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그만큼 인터넷 없는 삶을 생각하기 힘들어졌고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만물 인터넷 시대가 왔다. 최근에는 TV를 비롯해 냉장고와 인터넷도 인터넷이 장착되고 이를 통해 제어하는 시스템이 구현되기 시작했다. 애플에서 곧 발매될 것이라는 스마트워치도 홈오토메이션과 결합될 것이라는 예측이 유력하다. 과연 만물 인터넷이나 스마트워치와 같은 최근의 움직임들이 더 이상 홈오토메이션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들지 않고 집 안을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정우성 포항공대 산업경영공학과·물리학과 교수